노배우들 '명품연기'에 빠져보시라
"뻔뻔한 얼굴 들고 막장 드라마도 하는데 우리가 '뮤지칼' 하면 왜 안돼?"
6순 노인들이 다시 힘을 낸다. 고령화 시대의 문제를 또래의 연극인들이 조망한 '한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은 극단 산울림이 추구해 온 리얼리즘 미학의 연장선에 놓인다. 동시에 연출가 임영웅-극작가 윤대성이라는 원로 콤비의 건재를 과시하는 무대다.
권성덕(71), 이인철(61), 이호성(57), 손봉숙(56) 등 네 배우가 자아내는 무대의 영기는 앙상블이라는 흔한 표현으로는 미치지 못할 바다. 먼저 간 방송 PD 친구의 상가에 조문 온 세 친구와 이혼한 전처 등 4명이 꾸미는 단촐한 무대는 "지구가 엄청나게 거대한 양로원이 된 시대", 살아남은 자들의 심정을 밀도 있게 표현한다.
상갓집에 당도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격렬하게 오열하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대목에서 이들의 실상은 들통난다. 자신을 잉여인간으로 여기며 내뱉는 말이, 무대 상황 속에서 골계의 효과를 내는 것은 희곡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내 마누라는 날 증오해." 심각하게 말하는데, 정작 객석은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 "마누라가 해 준 밥 먹은 지 오래"라는 대사에서는 드디어 참았던 웃음보가 폭발한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지없이 편안한 것은 그마저도 일상 속으로 끌어 안는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 덕이다.
냉혹한 구조조정은 그들의 서글픈 현실이고, 모처럼 무장 해제돼 털어놓는 불륜담은 마치 빛 바랜 훈장 같다. 아내의 맞바람까지, 이야기는 스스럼없다. 싸구려 안주에 털어 넣는 소주는 먼저 간 친구에게 퍼붓는 욕을 한 사발 끌어낸다. 이들의 푸념 속에는 자신들의 노고를 거지발싸개처럼 여기는 세상에 대한 공격의 날이 번득인다.
미국에서 날아 온 부인이 먼저 떠난 전 남편을 위해 살풀이를 추는 대목은 이 무대의 별미다. 연출자의 부탁으로 살풀이 명인 조흥동이 안무하고, 그 제자가 와서 훈련시킨 결과다. 바닥에 뿌린 열 포대의 황토는 임영웅 무대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 해 온 무대미술가 박동우의 아이디어다. 고즈넉한 시골집의 이미지로 객석에 삼투된다.
윤대성은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내가 아는 친구들이고, 죽은 이조차 나의 친구"라며 "은퇴 후에도 10년, 20년을 늙어가면서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노인들을 통해 시대를 증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5월 2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여기저기서 초청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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