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연극인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지금도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지?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연극을 계속할 수 있지?
제가 연극을 시작하면서 처음 확인한 것은 '연극은 본래적으로 순수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70년대 연극판은 정부 당국의 지원 같은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연극배우들은 지금처럼 시간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70년대 연극배우들은 그냥 연극만 해야 했습니다. 영화나 TV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은 대다수가 신파극이나 악극 등 대중극을 하시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일컫는 정극을 하는 배우들은 영화나 TV 출연을 꺼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과 연기력을 자랑하시던 영화배우 김승호 선생 같으신 분은 연극계의 이런 고답적인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동극장 맨 뒷좌석에 앉아 연극을 보시다가 무대 위의 배우가 대사가 들리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은근히 깽판을 놓으셨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국립극단 최고의 여배우 백성희 선생도 젊은 시절 대중극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오래동안 설움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연극을 하다 보니까 먹고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1973년 12월 부산 시민회관 소극장 '스가나렐-억지로 의사가 되어' 공연을 끝내면서 저는 같이 연극했던 친구들에게 비장한 약속을 합니다.
"우리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연극에 대한 꿈을 꺾지 말고 버티고 있어라. 그때 다시 만나서 배 곯지 않고 연극 하자."
그 이후 저의 삶은 오히려 편했습니다. 80원만 내면 온종일 죽치고 있을 수 있는 낡은 클래식 다방 '오아시스'에서 잠만 잤습니다. 현실은 너무 낯설어서 나가기 싫었습니다.
군에 자원 입대한 것도 현실로부터 자신을 추방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저는 삼대 독자에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어서 생계유지 곤란 사유로 군 면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로부터 가능한 멀리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당도한 곳은 가평에 있었던 제3하사관학교. 제3하사관학교 생활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또 다른 무대였습니다. 하루 두 세시간 재우고 계속 훈련과 노동이었습니다. 아, 인간이란 것이 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구나 느끼면서 저는 DMZ에 투입될 병사로 훈련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육체적 담금질 속에서도 저의 상상력은 유지시키려 애썼습니다. M16 사격장에서 일차 사격에서 탈락한 후 저는 온종일 사격장을 구보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마침 제 생일인 7월 9일 여름이었지요. 마침 비까지 내렸습니다. 저는 온종일 비를 맞고 사격장을 뛰면서 '황금비늘'이란 단어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사격장을 뛰면서 '황금비늘'이란 시를 지으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까 몇 바퀴 뛰었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잊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지요.
어머니가 울며 불며 병무청을 들락거린 덕분에 저는 자대 배치된 지 두 달쯤 지나 생계유지 곤란 사유로 제대를 합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 저의 일상은 다시 단순해졌습니다. 부산 국제우체국 행정서기보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연극학교 동기생 하재영군을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만납니다. 당시 한창 잘 나가던 영화배우였는데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연극 계속하고 있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그만 말문을 잃었습니다. 그래, 돌아간다, 언젠가 다시 돌아간다.
그 이후 저는 닥치는 대로 살았습니다. 마산 한일합섬 염색기사로 두 달쯤 일하다가 조장을 쇠봉으로 후려치는 바람에 사표를 썼습니다. 다시 한국전력 사원 시험을 쳐서 발령 받은 곳이 밀양영업소였습니다. 밀양에 와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고 시를 썼습니다. 누가 왜 밀양에 연극촌을 세웠느냐고 묻길래, 밀양은 비밀스런 양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1979년 부산일보 기자 시험을 쳐서 다시 고향 부산에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십년이 흘렀는데, 1983년 12월 당시에 저는 시인이었고 결혼해서 노모와 딸 애를 키우는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작은 중고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런데 십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는 스스로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1월 처음 사표를 제출했는데, "다시 연극을 하기 위해서"란 瑛??듣더니 "세상 물정 모르는 미친 놈" 소리만 들었습니다. 1985년 다시 사표를 제출하게 되고, 역시 퇴짜를 맞습니다. 그리고 1986년 1월, 저는 세 번째 사표를 제출하게 되고 끝까지 설득 당하지 않은 끝에 보름 만에 사표가 수리됩니다.
왜? 십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친구들은 이미 사라졌는데 누구와 연극을 다시 한다는 거지? 여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분명했습니다. 그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현실이 낯섭니다. 문득 보들레르의 시 구절을 떠올립니다. 한번 하늘 뒷자락을 훔쳐본 자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연극이란 꿈의 세계를 경험한 자는 무대를 떠나는 순간 아마겟돈의 저주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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