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1930년대에는 신ㆍ구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앙과 민족에 등을 돌렸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이 엄혹한 시절 주기철 목사 등과 더불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기독교 지도자가운데 한 분이다. 하지만 그는 1945년 4월 25일,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넉 달 앞두고 44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꼭 65년 전의 일이다.
김교신과 한림의 의기투합
김교신의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한 인물은 한림(韓林, 1900~?)이었다. 김교신과 한림은 도쿄 유학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이렇게 말하면 한림도 당연히 기독교 신자이겠거니 생각할지 모르지만 뜻밖에 그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김교신이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성서를 공부하던 무렵, 한림은 와세다 대학에 다녔다. 그는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초대 책임비서를 지냈고, 신간회 도쿄지회 책임을 맡았다. 1928년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되었고, 그 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33년 9월에 만기 출옥했다.
<김교신 전집> (부키, 2001)의 '일기'에는 1933년 9월 초순 김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는 한림을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김교신은 감옥에서 나오는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어 감탄을 금치 못한다.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비쳤다. 김교신>
그는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의 거목이라면, 오늘의 기독신자 대다수는 고층건물의 옥상 분재(盆栽)에 불과하다"고 썼다. 신념에 목숨을 건 사회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기개에 견주어, 일제에 무릎 꿇은 193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김교신은 일제 탄압으로 그의 개인잡지 <성서조선> 이 폐간의 위기에 몰렸던 1940년 6월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받아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다. 성서조선>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여러 시간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형은 본래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의 거두(巨頭)지만, 나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교 신자가 안 한다면 자기가 뒷일을 돌봐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애국 단심 존중한 동지애
기독교 신자가 돕지 않는다면 내가 돌봐주겠으니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라고 유물론자가 격려했다는 말이다. 이념은 달라도 상대방의 조국을 향한 단심(丹心)을 피차 인정하기에 이런 동지애가 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념을 뛰어넘어 '두 거인'을 끈끈한 동지애로 맺어준 장(場)은 '의기의 세계'였다. 조국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만난 두 거인의 장한 기개가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는 통합을 이룩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6월'한국의 사회갈등과 경제적 비용' 보고서에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4위이고, 그로 인해 치르는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념적으로 상극이었던 김교신과 한림의 우정에서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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