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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군의 아기' 57년 만에 인천 귀향/ 6·25전쟁 때 버려져 입양된 데니얼 키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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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군의 아기' 57년 만에 인천 귀향/ 6·25전쟁 때 버려져 입양된 데니얼 키난

입력
2010.04.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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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가 내린 26일 오후 인천 남구 용현동 해성보육원에 하얀 피부에 갈색 눈을 가진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57년 전 미국 항공모함 USS포인트 크루즈호에서 '해군들의 아기(Navy's Baby)로 알려졌던 데니얼 키난(57)씨였다. 자신을 항공모함 위에서 길러준 한국전쟁 참전 용사 밀란(75), 갈빈(75), 스콧(76)씨와 함께였다.

키난 씨는 보육원 곳곳을 돌아보며 상념에 젖었다. 한 때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보육원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보육원이 생각보다) 정말 작은 곳이네요(Incredible, So small). 너무 감동적입니다(Very, very emotional)"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키난 씨가 대한민국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던 195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날도, 이름도 모른 채 누더기 강보에 싸인 채 인천의 한 미군 교육부대 앞에서 발견됐다. 한쪽 팔에는 화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어머니가 혼자 아기를 양육할 자신이 없자 미군 부대 앞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아기는 곧 인천에서 가장 큰 보육원이었던 해성보육원으로 인계됐다. 당시 보육원에서 수백 명의 아기들을 맡아 보호하던 필로메나 수녀는 허약한 이 아기를 품에 안고 미군 부대를 오가며 치료해 줬다. 그러던 중 대민 봉사 활동을 하던 미국 해군 군의관 휴 키난 대위의 눈에 들었던 것. 키난 대위는 아기를 입양키로 하고, 당시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소형 항공모함 USS포인트 크루즈호에 태웠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승조원도 아닌,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성인 남자만 있는 대형 전투함에 태워 기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USS포인트 크루즈호의 헤이워드 함장은 "군 사기를 위해서라도, 아기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길러야 한다"고 결심했다. 긴 전쟁에 승조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동료들끼리도 사소한 일에 주먹이 오가는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기는 항공모함의 마스코트이자 희망이 됐다.

항공모함이 인천항에 정박해 있었을 때에는 배에서 아이를 길렀고, 작전이 시작되면 해성 보육원에 잠시 맡겼다. 아기 필수용품인 기저귀는 침대 시트를 잘라 만들었고, 우유는 승조원들의 급식을 조금씩 모아 마련했다. 특히 배 곳곳에 내걸린 아기 기저귀는 미 해군에서 'USS포인트 크루즈 호' 만의 상징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키난씨를 '베이비'라고 불렀다. 당시 승조원인 밀란씨는 "4개월 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백 명의 동료들이 함께 기른 희망의 아기였다"라며 "베이비는 전쟁으로 지친 승조원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했다"라고 회상했다.

문제는 한국 국적의 아기가 미국 입양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인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헤이워드 함장과 군종 신부였던 라일리씨는 당시 부산 미 대사관과 인천항을 수 차례 오가며 입양 수속을 시도했지만 까다로운 비자 발급 요건 때문에 입양 절차는 더디기만 했다.

마침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우연히 USS포인트 크루즈 호의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가 'Navy's Baby'의 사연을 알게 돼 닉슨의 특별 지시에 따라 입양 절차는 급물살을 탔다. 아기는 53년 12월 1일 인천을 떠나 일본을 거쳐 같은 달 15일 미국 아버지 키난 대위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 아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해 잡지사 편집자로 일했다.

특히 93년 9월 포인트 크루즈호 참전용사 재회 모임에서 키난씨는 40년 전 항공모함 안에서 자신을 돌봐줬던 참전용사들과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 감동적인 얘기는 승조원들의 증언 과정을 거쳐 94년 <리더스다이제스트> 에 소개된 데 이어 1997년 영화(A thousand men and a baby)로도 제작돼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57년이 흐른 올해 키난 씨는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참전 용사 및 가족 한국 방문 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인천 해성 보육원을 찾았다. 키난 씨는 "해성 보육원은 내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곳"이라며 "필로메나 수녀님을 비롯해 입양되기까지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특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부모에 대해서는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갖도록 배려해 준 것"이라고 용서의 마음을 표현했다.

키난씨 일행은 각국 참전기념비에 참배하고 판문점과 국립묘지, 전쟁기념관 등을 둘러본 뒤 내달 1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인천=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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