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6일 영국이 5년만에 총선을 치른다. 1992년 총선 이후 가장 박빙의 판세다. 제2야당의 부상으로 양당 체제가 흔들려 74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 다수당이 없는 ‘헝 의회’ 출현이 유력해 보인다.
가장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쪽은 집권 노동당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보수당에 뒤지는 것은 물론 과거 확고한 양당 체제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자유민주당으로부터도 위협을 받고 있다. 토니 블레어를 내세웠던 97년 총선부터 내리 3번을 승리, 13년을 군림해 온 노동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노동당의 몰락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2007년 6월 블레어로부터 총리직을 승계한 고든 브라운 총리는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에 시달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금융산업 위주의 영국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게 컸다. 노련한 재무장관 출신의 브라운 총리를 믿었던 국민들은 금융위기 대처과정에서 노동당의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했다. 여기에 의원들의 공금 유용 스캔들, 이라크전 참전 비판 여론, 노동당 내 분열상 등은 줄어든 지지율을 마저 갉아먹었다.
반면 보수당은 노동당의 실정(失政)에 따른 반사이익을 챙기는 한편 온정적 보수주의 혹은 개혁적 보수를 표방, 진보적 색채를 가미하는 전략으로 노동당 지지자들을 흡수해 왔다. 마치 블레어가 노동당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킨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큰 선거 쟁점 중 하나인 경기침체 극복과 관련, 보수당이 금융위기 대처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당과 달리 재정지출 축소를 당장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노동당이 계획 중인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을 연간 3만5,000파운드 이하 소득자에게는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여기에다 최근 선거전이 본격화하면서 자민당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 처음 도입된 TV토론을 통해 자민당의 정치샛별 닉 클레그 당수가 신선함을 무기로 기존 정치인들에 식상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탓이다. 선거운동 시작 전만 하더라도 지지율이 20% 안팎이던 자민당은 보수당과 노동당으로부터 10% 포인트 가까운 지지율을 빼앗아오면서 총선 막판에 급부상하고 있다. 클레그를 ‘영국의 오바마’로 추켜세우는 자민당의 전략이 효과를 본 셈이다.
다만 현재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보수당 역시 낙관할 상황은 아니다. 자민당의 돌풍에 따른 지지율 피해가 노동당보다 보수당에서 다소 크게 나타나는 점은 부담이다. 또한 650개 선거구별로 다수득표자 1명씩을 뽑기 때문에 전국적인 정당 지지도가 의석수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현재 보수당의 지지율은 노동당보다 5% 안팎 정도 앞서고 있는데, 이 정도로는 보수당의 과반 의석 차지가 어려운 것으로 영국 언론들은 관측하고 있다. BBC방송이 25일의 유거브 조사 결과(보수당 35%, 노동당 27%, 자민당 28%)를 반영해 의석수를 예측한 결과 보수당 283석, 노동당 254석, 자민당 84석이었다. 같은 날 실시된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대입하면 오히려 노동당이 근소한 차이로 제1당이 된다. 물론 어느 경우나 현 상태로는 과반(326석) 정당이 나오지는 못했다. 결국 13년만의 정권 교체 여부는 자유민주당을 중심에 둔 연정 조합 그림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 英 노동당의 운명은 제3자 손에…
영국 총선 역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15일 90분간의 TV토론은 총선 판도를 요동치게 했다. 과반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노동당의 4연속 집권이냐', ‘보수당에 의한 13년 만의 정권교체냐'를 좌우하는 핵심 키를 급부상한 자유민주당 닉 클레그 당수가 쥐게 됐기 때문이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클레그는 이 토론회 이후 자민당의 지지율을 12%나 올렸으며, 더타임스는 그의 인기가 1945년 처칠이 기록했던 지지율(83%)에 근접하는 72%의 지지를 획득했다고 보도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의 선전이 점쳐지던 토론회에 뜻밖의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클레그와 캐머런 둘다 43세 동갑으로 노쇠한 브라운 총리보다 TV토론에 강점을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신선한 클레그가 최대 수혜자가 됐다. 클레그는 노동당에 대해서는 경제 실정을 부각시켰고, 보수당에는 유럽내에 영국 고립을 심화시켰다며 양당을 싸잡아서 비판하면서 차별점을 보였다. 준수한 외모와 함께 신세대다운 당당함이 무기다. 아내와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젊은 부부에게 맞지 않는 직업”이라며 2005년 EU의회 의원직을 과감히 사퇴하기도 했고, “30여명과 잠자리를 했다”며 여성 편력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26일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연립정부의 캐스팅보트를 쥔 클레그 당수는 일단 보수당을 선택했다. 자민당으로서는 정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노동당에 가깝다. 하지만 클레그는 보수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의 연설문 작성자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현 브라운 정권에 날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보수당에 더 기울어 있다.
그렇다고 클레그가 보수당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25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여론조사들을 보면 노동당이 제3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럴 경우)노동당이 ‘다우닝 10’을 차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노동당과의 연정을 통해 영국 총리 관저인 ‘다우닝 10’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발언이다. 일간지 더선은 이에 ‘노동당과 협상을 하겠지만, 내가 총리가 되야만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노동당은 즉각 자민당 끌어안기와 동시에 ‘클레그 효과’차단에 나섰다. 지난주 브라운 총리는 노동당과 자민당이 힘을 모아 보수당의 집권을 막아내자며 진보연합 기치를 내걸었다. 캐머런 보수당수는 일단 제1당이 되기 위해 노동당 표밭에서 20석 이상을 끌어오는 데 총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헝 의회’가 예상되는 이번 총선처럼 절대 다수당이 나오지 않을 경우 연정협상 우선권은 현 브라운 총리에게 있지만, 이후 협상에 실패할 경우 총선 제1당 당수가 총리에 올라 조각을 한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헝 의회(Hung Parliament)란?
과반 의석을 점한 다수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헝 의회(Hung Parliament)'는 다수당이 없을 때의 불안함을 반영한 영국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의회'로 해석해볼 수 있다.
영국 BBC에 따르면 1945년 이전까지 영국에서도 정당간 연합이 빈번이 일어났었다. 실제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 보수당, 자유당이 의석을 나눠 갖는 헝 의회가 나타났다. 그러나 차츰 영국 정계가 노동당과 보수당의 양당체제로 재편되면서, 헝 의회는 거의 사라졌다.
가장 최근의 헝 의회는 1974년 2월 총선에서 출현했다. 노동당이 301석, 보수당이 297석을 차지해 두 정당 모두 과반인 318석에 미달했다. 에드워드 히스 당시 총리(보수당 당수)는 14석을 얻은 자유당 등과 협상해 연합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총선 4일만에 물러났다. 이에 따라 총선에서 제1당이 된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이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국 불안이 이어지면서 의회가 해산되고 그 해 10월 다시 총선을 실시해 노동당이 과반에서 3석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또 1996년 보수당 집권 당시, 보궐 선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헝 의회가 생긴 적도 있었다.
'헝 의회'라는 단어는 영국 일간 가디언의 시몬 호가트 기자가 1974년 6월 22일 처음 기사에 사용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영국 정치인들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BBC는 "헝 의회라는 표현은 배심원들이 결론도출에 실패해 재표결에 나서야 하는 상태를 뜻하는 미국식 표현 'hung jury'에서 왔다"며 그 부정적인 의미를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은 물론, 연정이 빈번이 이루어지는 유럽 어느 국가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헝 의회에서 오히려 입지가 넓어지는 군소 정당들의 불만이 많다. 영국 사민당은 1985년 '협상(negotiating) 의회'라는 표현을 썼고, 2005년 이후 자민당과 그외 군소정당에서는 '균형(balanced) 의회'라고 칭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