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득보다 증가속도 빨라… 경제 리스크 '요주의 1순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가계부채 문제다."(이성태 전 한은 총재, 2월 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가계부채는 유의해야 하지만 국가경제에 큰 위험이 되는 상태는 아니다"(김중수 한은 총재, 4월 9일 금융통화위원회)
한국인들의 개인 빚, 즉 가계부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전ㆍ현직 한국은행 총재마저 엇갈린 시각을 보이고 있을 정도. 전문가들은 대체로 가계부채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데는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해칠 정도로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급증하는 가계부채
지난해 말 현재 가계부채 규모는 733조원, 가구당 빚은 4,337만원에 이른다. 10년 전에 비해 배가 넘는 수준으로 급증했다.
문제는 가계부채 증가 그 자체가 아니다. 소득보다 더 빨리 늘어나고, 그럼으로써 빚 갚을 능력(상환능력)이 악화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0~2009년 개인의 가처분소득은 연평균 5.7% 증가한 데 반해 가계부채는 11.6% 증가했다. 이에 따라 부채상환능력을 나타내는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배율은 지난해 1.4배에 달했다. 미국(1.3배) 일본(1.1배) 독일(1배) 등 주요 선진국보다 높은 수준이다.
주목할 점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당수 국가에서 부채축소(디레버리징)이 이뤄진 반면, 우리나라에선 유독 거꾸로 빚이 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0.2%였고 전국가구의 평균 소득은 0.5% 늘어나는 데 그쳤지만, 가계부채는 6.6%나 증가했다. 우리나라 가정만 부채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가계부채가 꼭 파산으로 이어질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빚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늘어나면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소비를 제약하고, 결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신창목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09년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소비억제 효과가 소비증대 효과보다 컸다"며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이후 처음"이라고 밝혔다.
건전성 문제없다?
가계부채의 규모나 증가 속도가 우려할 만하다는 데는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하는 반면, 얼마나 금융건전성을 위협하는 수준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따른다.
우선 가계부채가 부실화할 위험이 희박하다는 쪽은 은행 담보인정비율(LTV)이 50% 미만으로 매우 낮다는 점을 강조한다. 만에 하나 주택가격이 20~30% 폭락해도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팔아 대출을 회수하면 금융기관 건전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신창목 연구원은 "미국(76.6%) 일본(70~80%) 영국(70%) 프랑스(78%) 등 주요국 LTV는 우리나라에 비해 높다"고 지적했다.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갚을 만한 능력이 된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전체 가계부채의 70% 이상은 고소득층(소득 기준 4, 5분위)에 집중되어 있다.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빚을 지는 만큼, 상환에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부채 이상으로 자산이 늘었다는 점도 자주 인용된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가계부채 대비 실물자산은 약 3.5배로 선진 12개국 중 4위로 높다"면서 "(충분한 자산이 담보되어 있는 만큼) 가계부채 문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거나 소비의 급격한 위축으로 이어지는 등 우리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한국적 특수성
하지만 우리나라만의 가계대출 특성을 고려하면 부실위험이 작게 봐선 곤란하다는 지적도 많다. 노영훈 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출자산을 유동화시켜 리스크를 분산하는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주택담보대출의 유동화율이 극히 낮아 최초 대출기관이 위험부담을 지속적으로 안고 가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전세제도를 감안할 때 대출금에 전세보증금까지 추가하면 실질 LTV가 70~80% 이상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다"며 "자가 입주율이 낮은 신규입주 아파트단지의 시세가 20% 이상 급락할 경우 '깡통주택'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주택담보대출 중 10년 이상 장기 원리금 분할상환 방식(모기지대출)의 비율이 겨우 30%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머지는 2~3년 단위로 만기를 연장하면서 이자만 내는 방식이다. 박 교수는 "이 방식은 주택가격 급락 등 충격이 발생했을 경우 은행들이 만기연장을 해 주지 않고 상환을 요구할 수 있어 대출자가 집을 팔아야 하는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가계대출의 대량부실화 가능성은 낮지만 우리나라 경제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부문이 가계부채인 것은 사실이며, 주택가격이 20~30%만 떨어져도 자칫 국가적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금융硏 보고서 "가계빚 매년 10% 가까이 증가… 7년후면 소득 2배"
가계부채가 앞으로도 매년 10% 가까이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7년 뒤면 소득의 2배 규모로 늘어날 것이란 얘기다.
금융연구원은 23일 발표한 '가계부채의 연착륙 방안'보고서에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및 주택가격이 과거 5년 평균치인 6.2%와 4.0% 정도 증가할 경우 향후 가계부채는 매년 약 9.7% 정도씩 증가해 2017년에 이르면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배율이 2배를 웃돌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배율은 현재 1.4배 정도다.
가계부채가 이렇게 증가하면 부작용도 커진다. 금융연구원은 "가계부채 증가는 장기적으로 소비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고, 특히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한계상황에 달해 가계부실이 빠르게 확산될 경우 금융불안뿐만 아니라 경제위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가계부채의 증가추세를 하향 조정해 소득대비 가계부채가 안정적인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유도하되, 급격한 부채조정 시 경제에 단기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계부채의 연착륙 유도방안으로는 우선 ▦소득대비 가계부채의 장기적 상한선을 130%로 설정하고 ▦연간 가계부채 증가율 가이드라인을 7%로 정해 금융기관들이 이 선을 지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예대율 규제 단계적 추진 ▦점진적 금리인상 ▦총부채상환비율(DTI) 확대 등 가계부채를 장기적으로 조정해 나가고, ▦가계대출 중 장기ㆍ분할상환형이 차지하는 비율 확대 ▦저소득층이 상환 능력을 회복할 때까지 지원하는 방안 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진주기자
■ 전문가 제언/ 저소득층 부채 해결이 시급…장기적으론 상환기간 등 늘려야
가계 부채는 정부 뿐 아니라 가계 스스로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지만 막상 이를 해결할 묘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당장 금리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처럼 저금리 정책 기조를 유지하자니 빚은 더 늘어날 것 같고,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가계의 이자부담이 커져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딜레마가 있다. 물론 가계 소득이 늘어 부채 상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가계 주요 소득원인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빚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부채 조정에 나선 후 장기적으로 부채 상환 기간을 늘려 부채 자체의 위험도를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빚 상환능력이 떨어지는 저소득층의 가계 부채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최근 가계대출의 증가세가 상환능력이 있는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이뤄져 와 부채 증가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며 "다만 저소득층들이 기존 빚을 갚지 못할 우려가 커지고 있어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금리 인상이 될 경우 저소득층의 이자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 부채가 그대로 부실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신창목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경기 회복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저소득층의 경우 소득증가가 정체돼 있다"며 "미소금융 등 서민금융 지원책을 보다 강화하고 저소득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할 장치를 마련해 놓고 금리 인상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정망을 구축한 후 단계적으로 가계부채의 재무구조를 개선시켜가야 한다는 얘기다.
중장기적으로는 가계부채의 만기구조를 단기에서 장기로 바꿔 상환부담을 줄여야 한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현재 우리나라 가계부채를 뜯어 보면 원리금 상환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데다 금리 변동주기도 대부분 3개월짜리 단기에 몰려 있다"며"가계 부채 자체를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나눠 갚을 수 있도록 해 부채 자체의 위험도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득이 급격히 늘어 빚을 빨리 갚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상환 부담을 줄여주는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대출 기준 자체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노영훈 조세연구원 연구원은 "가계부채는 주로 부동산 담보대출 중심으로 늘어왔다"며 "담보물건의 자산가치가 아니라 대출자의 상환능력에 따라 대출 규모를 정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가계부채 증가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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