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삶을 위해 산책과 여행은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역사산책과 역사여행을 통해 초심을 되찾고 선열들과 희생자들을 새롭게 만나야 할 한 해입니다. 2ㆍ28대구학생의거, 3ㆍ15마산의거, 4ㆍ19민주혁명 50주년의 올해는 또한 3ㆍ26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5ㆍ18광주항쟁 30주년, 6ㆍ10남북공동선언 10주년, 6ㆍ25민족상잔의 비극 60주년, 8ㆍ29경술국치 100주년, 11ㆍ13전태일 노동청년 분신항거 40주년을 맞는, 우리 현대사를 압축한 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각인됐던 4월 체험
1960년 4월 저는 대신학교 1년생이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과정은 엄격한 기숙사 생활로 외부와는 일체 차단된 은수적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뿐 아니라 당시 전 세계 가톨릭의 공통점이기도 했습니다. 세속, 마귀, 육신을 이른바 삼구(三仇)라 하며 세상을 외면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교에 4월혁명의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혜화동 거리에서의 외침, 동성고교생들의 시위 그리고 많은 학생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아픈 소식은 우리 신학생들의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하였고 우리의 관심은 온통 혜화동, 종로거리로 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4월 26일 낮기도 시간에 성당에 모인 우리 신학생들에게 한공열 학장신부님(후에 광주 대주교)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강론해 주셨습니다.
"오늘 오전 10시 30분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더욱 정성껏 기도하기 바랍니다. 불사조(Phoenix)라는 중동신화의 새가 있습니다. 천년만년을 사는 새입니다. 이 새는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나무둥치를 찾아와 자기 몸을 나무둥치에 비빕니다. 계속 비비면 그곳에서 불꽃이 일어 깃털에 옮겨 붙고 결국 그 새는 불에 타 죽고 한줌의 재만 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재 속에서 하얀 알이 생기고 그 알이 부화하여 새끼 불사조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불사조는 높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릅니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새 생명을 이어주기에 우리는 이 새를 불사조라고 부릅니다. 때문에 교부들은 이 불사조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바로 며칠 전에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탄에 스러져간 사랑하는 청년, 학생, 시민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불사조들입니다. 그분들의 피와 죽음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성경 말씀을 되새기며 그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들께 역사적 책무,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불사조의 정신을 지닌 신학생, 사제가 되기 바랍니다. 자, 이제 모두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시다."
우리는 '주 하느님을 찬미하자'라는 뜻의 'Te Deum'이라는 라틴어 성가를 장엄하게 불렀습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감격의 기도, 감동의 성가였습니다. 4월혁명의 신선한 바람이 세상과 단절했던 신학교와 교회공동체의 심장을 완전히 흔들었던 엄청난 사건, 그것은 바로 제2의 성령강림사건과도 같았습니다. 12년의 독재, 16년의 권좌를 꿈꾸던 독재정권이 종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각인된 아름다운 변혁에 대한 4월 체험입니다. 이 체험은 제 사제 생활의 길잡이가 되고 1970, 80년대 유신독재와 신군부 억압 시기 중 4ㆍ19를 맞이할 때마다 학생들과 함께 나눈 귀중한 영적 자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대한 성찰과 다짐
그런데 이 아름답고 장엄한 4ㆍ19의 민주주의의 꽃이 부끄럽고 불행하게도 1년 1개월 만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군사반란을 통해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웠던 때가 바로 이 1년 간이었는데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5ㆍ16군사반란이 없었다면 참으로 우리는 훨씬 더 아름다운 민주국가를 이룩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군사반란이란 그 오점을 우리는 아직도 깨끗이 씻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국을 빼앗긴 상황에서, 침략국 일본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동족을 배반하고 살해하기까지 한 친일 매국노들이 어떻게 감히 그리고 여전히 이 독립국가에서 지도자인 양 행세할 수 있고, 불의한 이승만 자유당 독재를 타파한 4ㆍ19민주혁명을 아름답게 드높이면서 어떻게 그 이승만을 예찬할 수 있으며, 4ㆍ19민주주의의 꽃을 짓밟은 어이없는 5ㆍ16군사만행과 그 추종자들을 묵인하고 있는 이 현실은 논리적으로나 민족사적 관점에서 참으로 큰 모순입니다. 선열들 앞에 민족적 참회의 기도를 올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의 운명을 킵裡?는 사건이 10년 단위로 일어난 것을 저는 나름대로 하늘의 섭리라고 해석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외세에 의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치욕의 역사, 동족상잔의 부끄러운 죄악, 독재 권력에 의한 주권 제한을 당연시한 무지의 역사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된 3ㆍ1운동 정신,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지 못하였기에 친일잔재 청산과 민주화운동 정신계승에 대해 여전히 소모적 논쟁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4ㆍ19혁명 50주년, 5ㆍ18광주민중항쟁 30주년을 맞아 제가 봉사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ㆍ28대구민주운동기념사업회, 3ㆍ15의거기념사업회, 4ㆍ19민주혁명회, 6ㆍ3동지회, 부산민주항쟁계승사업회, 5ㆍ18기념재단,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등 8개 기관ㆍ단체가 힘을 모아 올해를 '민주화운동 정신계승의 해'로 선포하고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지난 2월 22일 결의한 바 있습니다.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도 버젓이 써있음에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아직 우리는 4ㆍ19 관련 사료총집을 제대로 발간하지 못했습니다.
역사는 정의의 증언이어야 한다
이에 올해 우리는 4월혁명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자 합니다. 1959년 12월부터 시작한 부정선거 획책 자료로부터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 제출까지 문서, 사진, 지역일간지, 깃발, 참여 중고등학교의 교지, 개인일기, 서신 등 모든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국가기록청, 국무성, 주한 미대사관의 자료와 당시 주한 미국대사 등 관련자의 회고록도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참여자의 증언을 채록하여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 대한 기억을 재현토록 할 것입니다.
4ㆍ19혁명 자료를 종합하면서 저는 역사의 필연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남원 출신의 김주열 학생이 입학시험을 위해 마산상고에 갔다가 맞부딪친 3ㆍ15부정선거 규탄 시위 현장에서 실종되고 4월 11일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르며 제2차 마산의거로 이어진 사실, 당시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4월 20일 이후에 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정치폭력배들의 피습을 받은 것이 4월 19일 전국적 민주화 시위로 이어진 사실, 4월 19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위 현장에 늦게 도착한 동국대 학생들이 "동대는 경무대로"라고 외치면서 경무대로 향한 발걸음이 경찰의 발포와 대규모 희생자 발생으로 이어진 사실 등에서 4ㆍ19 역사의 진전을 새롭게 종합하게 됩니다.
역사는 사실에 기초한 기록과 정의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이에 멀리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거듭하던 항일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임시정부(4ㆍ13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 4ㆍ3제주항쟁의 억울한 희생자들, 유신 독재권력과 그 하수인으로 전락한 사법부에 의해 사형판결 몇 시간 만에 사형을 당해야 했던 이른바 인혁당 관계자들, 5ㆍ16군사반란 세력에 의해 능멸 당했던 4ㆍ19혁명 희생자와 참여자들, 그리고 진실을 알리고, 알고자 했던 모든 분들, 4월이 안고 있는 이 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저는 새삼 4월 정신의 핵심을 깊이 묵상합니다.
4월 정신이 바로 항일 독립투쟁과 친일 잔재 청산, 민주주의 실현과 독재 잔재 타파 그리고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임을 깨닫고 4월의 불사조들을 노래하며 민주주의 실현을 다짐하고 기도합니다.
■ 약력
▦1942년 서울 출생 ▦1965년 가톨릭대 졸업, 1973년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 대학원 박사 ▦1974~92년 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1976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1976년 3ㆍ1민주구국선언 등으로 두 차례 투옥 ▦1988년 평화신문, 평화방송 사장 ▦저서 <약자의 벗, 약자의 하느님> <말씀이 몽치가 되어>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왜 사제인가> 등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천주교 청구본당 주임신부 왜> 불을> 말씀이> 약자의>
박서강 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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