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점보시리즈로 시작한 농구대잔치는 출범 11년 만인 94년 ‘대이변’이 연출됐다. 현대 삼성 기아 실업 3강의 전유물이었던 우승컵이 연세대로 넘어갔다. 연대는 기아의 6년 연속 우승을 가로막으며 대학팀으로는 최초로 우승트로피를 품었다.
당시 연세대는 포인트가드 이상민(38), 스몰포워드 우지원(37) 김훈(37), 센터 서장훈(36) 등 국가대표에 버금가는 초호화멤버를 갖추고 있었다. 멤버 개개인 모두 ‘오빠부대’를 이끌었지만, 그 중에서도 ‘컴퓨터 가드’ 이상민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이상민은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이상민의 인기는 97년 프로 출범 이후로도 식을 줄 몰랐다. 이상민은 2001~02시즌부터 2009~10시즌까지 올스타 팬 투표에서 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9년 연속 1위는 앞으로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영원한 오빠’ 이상민(서울 삼성)이 코트를 떠난다. 삼성은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상민의 계약기간은 1년 남았지만 앞당겨 은퇴하기로 했다. 구단은 이상민의 지도자 연수를 돕겠다”고 발표했다.
이상민은 “삼성에서 정상을 차지하고 은퇴하고 싶었지만 마무리를 못해 아쉽다. 체력저하, 허리부상 때문에 좋은 모습을 보이기 어려워 은퇴를 결심했다”고 은퇴의 변을 밝혔다.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이상민이지만 위기도 있었다. 삼성과 기아의 구애를 뿌리치고 94년 KCC 전신 현대에 입단한 이상민은 2007년까지 팀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7년 KCC가 자유계약선수(FA) 서장훈(전자랜드)을 영입하면서 이상민을 보호선수명단에서 제외한 까닭에 이상민은 KCC를 떠나야 했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이상민은 은퇴까지도 생각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삼성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상민은 2007~08시즌과 2008~09시즌에는 팀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이끌며 제2의 인생을 열었다.
이상민은 22일 오전 11시30분 서울 태평로빌딩 27층 태평로클럽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는다.
최경호 기자 squeez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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