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기조차 싫었던 노래가 있다. 어린 시절 열심히 불렀던 <6ㆍ25의 노래>다. 지독한 가사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오랫동안 피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동전의 양면을 함께 봐야
이처럼 강렬한 적의와 분노를 드러낸 노래가 또 있을까. 한국사의 숱한 고난을 되새기는 어떤 노래도 이렇게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지는 않는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노래는 물론이고, 군가에도 원수의 씨를 말리겠다고 다짐하는 노래는 없다.
가사로 보아 인천상륙작전 뒤 북진 과정에서 태어났을 이 노래는 북진통일 의욕에 넘쳤던 당시의 권력과 장병의 사기를 북돋워야 할 군의 요구에 딱 들어맞았을 듯하다. 그러나 전쟁 당시 권력과 군이 장악한 선전력과 문화전파력을 감안하더라도, 국민 뇌리에 깊이 침투하려면 수용자 측의 정서적 공감이 작용했어야 한다. 당시 적잖은 사람들이 그 정도로는 격심한 분노에 치를 떨었고, 그것이 당대에 이 노래를 퍼뜨린 매개물이자 후대에까지 비슷한 공감을 전하는 기초였던 셈이다.
<6ㆍ25의 노래>에 견줄 독한 노래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국전쟁 이전의 기억은 세월의 풍화 작용이 흐렸고,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의 고통과 분노의 기억은 '민중가요'나 '노동가'가 담았다.
어떤 구체적 사건을 계기로 정서적 공감이 폭발하는 게 꼭 한국적 특수 현상은 아니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의 분노는 세계로 확산됐고, 테러 주체로 지목된 '알 카에다'라는 조직을 넘어 무고한 아랍인들까지 경계 대상이 된 것이 한 예다. 게으름을 타고 나서, 구체적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공을 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정서적 동조나 반발로 간단히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집단적 동조나 반발의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고, 한국은 심한 편에 속한다. 많은 요인이 거론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속담의 비난처럼,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가 다른 것을 소인배 마음가짐으로 여겼던 전통적 가르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전통적 가르침은 개인의 인격적 발달을 겨냥한 가르침으로는 앎과 행동의 일치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 사회 차원으로 접어드는 순간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오히려 미덕이자 예절의 징표가 된다. 길을 가다가 어깨를 부딪치면 불쾌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인상을 쓰며 상대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가볍게 사과를 하고 갈 길을 가는 게 낫다. 표리부동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평화에 불가결하다.
500원짜리 동전의 앞면에는 '500'이란 교환가치가 새겨져 있지만 뒤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학이 그려져 있다. '500'이란 숫자가 냉혹한 경제적 현실을 투영했다면, 우아한 학의 비상은 정서적 지향을 담았다. 동전의 양면을 갈라서 쓰지 않듯, 정서적 감응과 겉으로 보이는 자세는 다르고, 어느 쪽도 버릴 필요가 없다.
찬 마음과 온화한 태도를
특히 국민의 집단의식이나 국가의 정책이 밖을 향할 때는 겉과 속의 분명한 차이를 간직하고 가야 한다. 밉다고 외면하고 말도 걸지 않거나, 좋다고 간까지 빼 줄 듯 해롱거려서도 안 된다. 상대가 성질을 부리지 않도록 온화한 태도를 보이되, 적절한 거리를 두는 차가운 속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자세가 가장 모자란 게 대북 인식과 대북 정책이다. 북한이 밉다고 최소한의 인도적 관심에 소홀하거나 '한겨레'라는 환상에 갇혀 최소한의 경계심마저 풀었다. 대화하고 지원해야 할 이웃이지만, 언제든 이해가 상충할 외적 실체라는 인식의 균형이 늘 아쉬웠다. '천안함 참사' 이후로도 동전의 양면 가운데 한 쪽만 보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제대로 내숭을 떨 수 있을 날이 다시 아득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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