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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내겐 너무 좋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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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내겐 너무 좋은 세상

입력
2010.04.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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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 다리미는 휘파람으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하며 옷을 다리고 빳빳하게 풀까지 먹인다. 커피잔은 "맛있는 콜롬비아 커피를 대령합니다"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계란 프라이는 스스로 입 속으로 돌진할 태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짧은 소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의 일부다. 주인공 뤽은 과학 문명의 발달로 점점 사람처럼 변해가는 기계들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불만투성이 강제적인 아침식사를 하던 중 금발의 여자 강도가 들이닥쳐 전자제품들을 다 쓸어간다. 하지만 뤽은 오히려 기분 좋다. 온, 오프 스위치가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없다

카페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려는 순간 여자는 뤽의 몸에 있는 인공심장을 꺼낸다. 뤽 또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소설 속 뤽도, 여자도 유기체가 아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 모두가 기계다. 여자는 말한다. 당신과 다른 기계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

문명은 이처럼 인간의 종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류 종말을 다룬 괜찮은 물건(영화) 하나가 <아바타> 열풍에 가려져 방점도 없이 사라졌다. <더 로드> ,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2007년 퓰리쳐 상 수상작인 코맥 매커시의 소설이 원작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그의 소설이다. 아바타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더 로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상징한다.

알려진 대로 아바타는 꿈의 세계다. 행성의 이름도 상징적인 판도라다. 행성의 풀과 나무들은 뿌리로 서로 소통한다. 신화의 세계, 유토피아의 세계다. 현실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정작 유토피아는 세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더 가까운 곳은 더 로드다. 끔찍한 공포의 세계다. 판도라와 정반대, 폐허의 세계다. 원인 불명의 재앙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다. 멸망한 인간세상의 미래, 건물은 무너졌고, 나무들은 불탔다. 태양은 뜨지 않아 언제나 춥다. 소설과 영화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단한 여정을 리얼하게 그린다.

더 로드의 세계는 절망과 어둠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히며 따뜻한 남쪽, 희망의 근원인 바다를 찾아 끝없이 걷는다. 아버지는 죽지만 아들은 끔찍한 세월을 견디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한 '불씨'는 아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꿈이었다.

아바타와 더 로드는 이처럼 대비되는 두 세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과 온갖 미디어는 아바타에 열광하지만 더 로드의 의미와 깊이가 외려 묵직하다. 아바타는 인간 내면에 잠들어 있던 유토피아의 꿈을 일깨우지만 더 로드는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더 로드는 더 무섭다. 가상 현실은 언제나 실제 현실로 다가온 게 인간의 역사다. 보라, 80여 년 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에 나타난 인공수정관 태아 문제는 오래 전 현실로 됐다.

대용품에 열광하는 현실

그러나 아바타에서 그리는 유토피아는 현실에 없는 노스탤지어를 소구하는 허구에 불과하다. 아바타에 뒤편에서 서성이는 것은 더 로드에 나오는 인류 종말의 어두운 세계다. 하지만 더 로드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유토피아의 대용품에 다름 아닌 아바타에 열광하며 그저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을 만족해 하며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아바타는 꿈의 세계, 판도라 행성으로 돌아가 순수의 낙원에 발을 디디기에는 인간은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져 있다. 그래서 더 로드가 아닌 아바타에 매료되는 현실이 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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