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탱크 위에 시민들 올려주는 군인들 보며 승리 확신"
"오전 학교 본관 인근 벤치 옆에 피어있던 라일락 향기. 4ㆍ19만 되면 그 때 맡았던 피의 향기를 잊을 수가 없어요."(김한식ㆍ70ㆍ당시 고려대 정외과 3학년)
50주년을 맞는 4ㆍ19 혁명의 주역이 이제는 노인이 됐다. 17일 오후 서울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은 물과 같은 세월에 깎여 유순해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고, 눈빛에서는 결기가 느껴진다. 이들에게 4ㆍ19는 어떤 기억일까.
'피' 혹은 '꽃'의 향기다
1960년 4월 18일,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이며 당시 국회의사당(현 서울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진출했던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은 해산 과정에서 정치깡패들에게 기습을 당했고, 머리띠는 피로 물들었다.
"4월 19일 아침부터 너나 할 것 없이 시위 나가기를 서둘렀어요. 그날 오전 대광고(동대문구 신설동)를 지날 때 '형님, 우리도 데려가요'라며 닫힌 교문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창 밖으로 애원하던 대광 후배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시위대가 서울신문사 앞에 도착했을 때, 조용한 가운데 질서정연한 발소리가 '착, 착, 착' 들려왔다. 대광고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참가한 것이었다. 시위대는 경무대(현 청와대)를 바라봤다.
"탕! 탕! 탕!"
"몇 분 안돼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바로 옆에서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엎고 피투성이가 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당시 대광고 학생회 대대장이었던 3학년생 배극일(71)씨에게 4.19는 '피'의 기억이자 진한 아쉬움이다. 배씨는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출정시간을 고지하고 3차에 걸쳐 1,000여명을 이끌고 궐기했다. 대광고 학생들은 "이만하면 잘했다"는 당시 생활주임 송성찬(현 99ㆍ재미)씨의 만류로 오후 5시께 해산했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에도 동국대, 서울대, 동성고를 비롯한 서울 전역의 학생 시위대는 점점 불어만 갔고 그만큼 희생도 늘어갔다.
"처음에는 우리도 대통령 하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물을 떠다 주고 시신수습을 돕는 시민들의 모습, 막판에는 탱크 위에 올려주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죠."
당시 전북대 정치학과 3학년생으로 전주시내에서 고등학생까지 이끌며 시위를 주도했던 전대열(70)씨가 전하는 지방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위는 3월 15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1943~60)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뒤 마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계속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 연설을 했다.
"4ㆍ19혁명은 학생이 주도했지만, 민주주의와 민족을 주제로 한 전 시민적 저항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4ㆍ19세대가 묻는다.
김청환 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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