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축만 하는것보다 술 먹고 빈병 모으는게 이익?
1980년부터 2009년까지 30년간 우리나라의 물가는 5.2배 정도 상승했다. 이는 쉽게 말해 80년에 1만원으로 5개를 살 수 있던 수박을 2009년에는 1개밖에 살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돈이 가지는 상품 구매력, 즉 실질가치를 떨어뜨린다. 재산을 현금이나 예금으로 보유하는 사람에게는 인플레이션이 큰 위험인 셈이다.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대략 30년을 벌어 30년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위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간과한다. 바로 화폐가 가져다 주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자산가치를 갉아먹는 인플레이션
누군가 80년에 1억원을 장롱 속에 넣어뒀다고 치자. 30년 후인 2009년에도 돈의 액수는 여전히 1억원으로 같겠지만 구매력을 기준으로 한 실질가치는 약 1,900만원 수준으로 감소한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앉아서 81%의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1920년대 독일이 경험한 초인플레이션은 이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연합국이 요구한 천문학적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독일은 돈을 마구 찍어냈다. 그 결과 23년 7월 독일의 물가는 1년 전에 비해 7,500배, 2개월 뒤에는 24만배, 다시 3개월 뒤에는 75억배까지 뛰었다.
22년 독일의 한 미망인은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60만 마르크라는 거액(22년 5월 독일의 신문 1부 가격은 1마르크였다. 이에 비춰 당시 60만 마르크는 현재 우리 돈 3억6,00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을 은행에 예금해 둔 후 스위스의 친정집으로 떠났다. 4년 뒤 귀국한 그녀에게 그 사이 은행으로부터 3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첫째 편지에는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질 예정이니 예금을 다른 데 투자하실 것을 권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으며, 두 번째 편지에는 "부인의 예금잔고가 너무 적어서 계좌를 폐쇄하고자 하니 빠른 시일 내에 예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라고 써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편지에는 "부인의 계좌를 임의로 폐쇄하였으며 현재 보유중인 소액권이 없어서 100만 마르크짜리 우표를 동봉합니다"고 써 있었다. 초인플레이션이 현재 원화 가치로 3억~4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불과 4년 만에 우표 1장 값으로 줄여버린 것이다.
저축은 오히려 손해?
20년대 독일에서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급여를 받고도 전액을 꼬박 저축한 사람보다 술만 마셔버린 주정뱅이가 남은 빈 병을 팔아 남긴 돈이 더 많았다는 일화까지 있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에서는 저축이 오히려 자산의 손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특히 이자로 생활을 하는 은퇴생활자의 경우, 저축을 통한 실질가치의 손실 폭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림 1> 은 1억원을 연 4% 금리로 은행에 예치했을 경우,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예금의 실질가치가 예치기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물가 상승률은 최근 10년간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평균치인 3.1%로 가정했다. 흥미로운 점은 예금이자를 꾸준히 다시 맡기는 경우에도 20년 후 실질가치는 1억1,900만원으로 고작 원금대비 19% 증가하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만약 은퇴 생활자들처럼 생활을 위해 매년 발생한 이자를 꾸준히 인출했다면 원금의 실질가치는 5,300만원으로 거의 반토막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인플레이션 위험요인(1) - 저금리 시대의 도래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가치 하락 위험요인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2000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저금리 환경을 들 수 있다. 금리가 높다면 웬만한 인플레이션에도 실질가치를 보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저금리 환경에서는 소폭의 물가 상승에도 이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림 2> 는 98년 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물가 상승 및 이자율 하락에 따라 실질이자율(풀어읽는 키워드 참조)이 어떻게 변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001년 7월 1년 정기예금 이자율이 5%대로 접어들고 물가가 5.3%로 상승함에 따라 저축의 실질 이자율이 0%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에도 저금리 또는 물가상승으로 인해 2~3차례 더 실질이자율 '마이너스'(-) 현상을 보였다. 그림>
인플레이션 위험요인(2_ - 글로벌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
원자재나 에너지 가격이 폭등할 경우 이들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고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이미 74년이나 80년 중동발 석유파동으로 인해 두 자릿수의 인플레이션을 체험한 바 있다. 2008년에는 원유 등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인해 5~6%대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2008년 후반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및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로 이런 위협은 해撚퓸駭? 하지만 경기가 정상화되고 중국 등 신흥 개도국들의 개발이 다시 본격화 될 경우 인플레이션 위험은 머지않은 장래에 다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화폐가 주는 착시현상-원금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
구매력 차원에서 현재 돈이 가지는 실질가치는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1만원과 1년 후의 1만원을 비교할 때 실질가치보다 상대적으로 확인하기 쉬운 돈의 액수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고용ㆍ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에서 "노동자들은 고용자가 자신의 수입액을 줄이는 것에는 반대하겠지만 물가를 올려서 실질수입을 줄이는 것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은 물가가 상승하는 것을 매월 수입금액이 감소하는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돈의 정확한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돈의 액수보다 실질가치를 봐야 한다. 정작 우리가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옷이나 음식 등과 같은 실물이기 때문이다. 고용ㆍ이자>
또 고인플레이션이 아닌, 단기간 나타나는 물가 상승국면에서는 구매력 저하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점도 착시의 한 이유가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인플레이션도 누구나 느낄 수 있도록 단기간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우리의 자산가치를 갉아먹는 것이다.
이런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는 투자원금의 개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자산관리나 투자를 할 때 자산이 수입에 있어서 원금의 개념을 돈의 액수가 아닌 실질가치에 두어야 한다.
특히 장기 금융상품을 선택할 때 이런 고민은 필수적이다. 한 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교육보험, 장수보험, 백수보험 등에 가입한 사람들이 보험금 지급시점이 되자 턱없이 줄어든 보험금의 실질가치를 깨닫고 불만을 터뜨리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필요성은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인플레이션 위험을 극복하려면
앞서 보았듯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돈의 가치가 계속 하락하기 때문에 현금이나 예금을 들고 있으면 손해를 보게 된다. 이럴 때는 현금이나 예금보다 금, 원자재, 석유 등 실물자산을 소유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실제 2000년대 들어 실물자산은 달러가치의 하락과 반대로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실물자산 관련 투자상품들이 인플레이션 위험을 대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기를 끌었다.
주식 또한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기업은 실물을 단순 보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하여 이윤을 창출하고 판매가격을 조정하여 인플레이션 위험을 이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자산관리에 있어서 이런 투자자산들을 포트폴리오에 추가적으로 편입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주식 등 투자자산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단기적으로 원금손실 위험이 있지만 장기로 투자하게 되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제러미 시겔 교수는 과거 미국의 자본시장을 분석한 결과, 10년 이상 장기 투자시 어떤 경우에서도 채권보다 주식이 안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마지막으로 원자재 등 자원을 많이 가진 국가들에 대한 해외투자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처럼 자원을 대부분 수입하는 국가들은 자원가격 폭등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투자의 범위를 조금만 넓히면 세계적으로 자원을 많이 보유한 나라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08년 중반 글로벌 인플레이션 시대에 브라질, 러시아 등 자원부국에 투자하는
▦ 풀어읽는 키워드
● 실질이자율
이자율은 물가상승을 고려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명목이자율과 실질이자율로 나뉜다. 명목이자율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지 않은 금리로 은행 등에서 제시하는 예금금리는 대부분 이에 해당된다.
반면 실질이자율은 명목이자율에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이자율을 말하는데 보통 명목이자율에서 물가상승률을 빼 계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은행의 예금이자가 연 7%이고, 그 기간 물가상승률이 3%라면 이 은행에 예금한 돈의 실질이자율은 4%가 된다.
곽재혁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수석연구원
■ 디플레이션 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전 세계가 과거 대공황에 버금가는 디플레이션(Deflation)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각국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한 바 있다. 도대체 디플레이션이란 무엇이며,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길래 전 세계가 이러한 정책을 폈던 것일까?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과 상반된 개념으로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디플레이션의 원인으로는 기업의 생산성이나 기술이 향상되어 생기는 경우와 수요가 줄어들고 경제 성장률이 하락하는 등 경제 활력이 감소해 나타나는 경우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물가가 하락한다는 측면에서는 디플레이션이 얼핏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 의한 디플레이션은 물가하락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넘어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1929~1933년의 미국 대공황과 90년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90년대 이후 수요 감소로 인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세금을 깎아주고, 연 0%에 가까운 초저금리 정책을 폈다. 하지만 오히려 물가가 떨어져서 돈의 실질가치가 플러스(+)를 유지한 데다 경기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 일본인들은 '절약'과 '저축'에만 집중하였고 이는 디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모두 경제에 해롭지만 과거 미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기화된 디플레이션은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려 국민들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한다. 최근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출구전략을 고민하고 있지만 쉽게 결정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곽재혁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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