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병일 카123테크 대표
"기능인들이 자기 기술만 믿고 창업했다가는 백전백패입니다. 간단한 회계는 기본으로 알아야 하고 직원들의 마음을 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기능인 최고경영자(CEO) 박병일씨가 사장님을 꿈꾸는 후배 기능인들에게 던진 첫 마디다.
1956년생인 박병일씨의 이름 앞에는 항상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명장 1호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우리나라에 단 세명 뿐인 자동차 정비 명장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엿한 중견회사의 사장이기도 하다.
2000년부터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동차정비센터 '카123테크'를 운영하고 있다. 매년 20억원 정도의 매출을 꾸준히 유지할 정도로 탄탄한 회사다. 비결은 그의 회사 앞에 붙어 있는 커다란 글자에서 묻어 난다. '못 고치는 차, 확실히 고쳐드립니다.'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명장으로서의 고집과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유 있는 그의 얼굴을 처음 대한 사람은 그가 유명 대학 공대출신이겠거니 하고 지레 짐작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가 초등학교 졸업장으로 이곳까지 뚜벅뚜벅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기능인 CEO로 성공한 비결도 고스란히 그의 과거에 녹아 있다.
화가를 꿈꾸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봄날 박씨를 비롯한 8형제는 서울 세검정 골짜기를 누비다 저녁이 돼 단칸방에 몸을 뉘었다. 소년 병일은 잠결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공부 잘하는 맏이 병일이를 계속 학교에 보내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부암동에서 기와장이를 하던 아버지가 일감이 떨어진 탓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기와를 대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며칠 밤을 고민하던 박씨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 간 곳은 영등포의 한 버스회사. '숙식제공'이 가능해서였다. 월급은 없었다. 그와 자동차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운행되던 버스는 모두 600여대. 그만큼 버스 정비기술도 대단한 첨단 기능으로 대접 받았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추운 겨울에도 걸레만 잡아야 했다. 호기심에 행여 아무도 없는 밤에 차 바퀴의 너트라도 조여 볼라 치면 선배들로부터 '감히'라는 말과 함께 묵직한 꿀밤을 맞곤 했다.
박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낮에 일하다 보면 교복 입고 등교하는 중학생을 보곤 했는데 정말 부러웠다"며 "저 애들의 부모는 누굴까, 나는 언제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고 말했다.
하루빨리 기술을 익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부모님과 동생들이 굶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소년의 절박함은 독학으로 이어졌다. 청계천 헌책방이 그에게는 도서관이었다. 밤에는 일본서적을 번역한 정비서적에서 시작해 백과사전, 기초영문법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런 그에게 낮의 정비소는 실험실이 됐다. '공구는 빌려줘도 기술은 빌려주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배들의 텃세가 심했지만 그를 막지는 못했다.
18살에는 남들보다 7~10살 빨리 작업반장이 됐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는 평범한 기술자에 그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했다. 83년 자동차 전자이론서를 접한 새 세상에 눈을 떴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밤잠을 설치다가 결국 대학교수를 찾아가 궁금증을 풀기도 했다. 국내에 자동차 전자제어 장치가 들어오기 3년 전이었다.
88년 국내에서 전자장치를 장착한 차가 고장난 적이 있었다. 정비사 누구도 나서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었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박씨가 가뿐하게 해결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자제어 정비의 선구자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자동차 급발진이 한창 시끄럽던 1999년에는 자동차 6대를 자비로 구입, 연구 끝에 원인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2002년 자동차 명장으로 선정됐고, 2006년에는 노동부가 주관하는 '기능한국인'에 뽑혔다.
자신의 공장을 갖고 싶다는 꿈은 2000년에 이뤄졌다. 그의 명성은 이때부터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수입차 서비스센터에서도 고치지 못한 차를 주인이 물어 물어 인천 남동공단 그의 공장까지 몰고 오는 사례도 적지 않다. 박 사장은 "기술과 정서를 직원들과 공유하다 보니 나타난 결과"라며 수줍어했다.
그의 공장 직원들은 대부분 입사 후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배움에 한이 맺힌 박 사장의 후원과 독려 때문이다. 송인권 공장장은 "사장님은 성실히 기술을 배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본보기이자 인생의 큰 형님같은 분"이라며 웃었다.
박 사장의 기술 욕심에는 끝이 없다. 2007년에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했던 일본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 3대를 들여와, 직원들과 분해해보고 토론하며 기술을 나눴다.
2008년에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기술계 최고 자격증인 기술사 시험에 도전,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7년 경력을 가진 뒤 3년 공부해야 딴다는 기술사 자격 시험을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그가 단 1년만에 취득한 것이다.
이제 그의 꿈은 '나눔'으로 향하고 있다. 기술을 후배들과 나누고자 자동차 관련 서적 30권을 펴냈다. 또 기능인들의 모임 한국마이스터연합회 회장을 맡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미래 기능인 후배들에게 공부와 나누는 삶을 강조했다. 5,000권이 넘는 그의 도서목록에서 고교과정 상업 교과서를 보여주며 "사장이 되려면 간단한 회계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그에게는 유명 대학 초빙교수에 CEO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래도 열정은 식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꿈은 기능인회관을 건립하는 것. 박 사장은 "기능인들간 소통의 장이 생기면 창업, 기술이전 등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에서 말로만 기능인 우대를 부르짖을 게 아니라 진작 있어야 할 기능인 회관 건립에 관심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 車정비 '기능인 CEO' 되려면…
한때 자동차 정비 기능인들 사이에서는 부분정비 업체인 일명 '카센터'를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눈치보고 월급 받을 바에야 사장님 되는 것이 낫다는 말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한 기능과 경영인으로의 준비가 모자란 상태에서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는 오히려 인생의 시련을 맛볼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조언이다.
카센터는 1998년 환란을 전후로 대폭 늘어났다. 자동차 회사들이 기능인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던 탓이다. 실제로 국토부의 자동차 부분 정비업체 관리 현황에 따르면 98년 1만3,082개였던 부분 정비업체는 2001년 2만6,398개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등록하지 않은 업체까지 고려하면 가히 폭발적인 증가세다. 하지만 지난 해 집계된 정비소는 2만9,498개. 9년 동안 3,000개 남짓 늘어난 것이다. 이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익 내기가 만만치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성공한 기능인 최고경영자(CEO)들은 공통적으로 자동차 기술을 평생 공부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마다 새로운 전자장비로 무장한 신차들이 쏟아져 나오는 까닭이다. 때문에 과거에는 정비경력 20~30년을 내세운 업체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어떤 업체가 전자장비를 잘 다루냐가 우수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 특정 부분을 전문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엔진이면 엔진, 미션이면 미션 등 자신의 기술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부분을 집중 연마할 경우, 입소문이 나기 마련이라는 지적이다.
김인호(43ㆍ인천 부평동) 사장은 "차 내구성이 향상되고 무상보증기간이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성공한 정비 기능인 출신 사장이 쉽지만은 않다"면서도 "10년 이상의 경력을 갖추고 컴퓨터를 잘 다룰 능력이 있다면 오히려 앞으로 성공 기회가 많아 질 것"이라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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