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드라마센터에 2년제 서울연극학교가 있었고, 극장이 있었습니다. 그 극장에서 새로운 연출가 연극이 공연되었습니다. 1970년 초연을 거쳐 71년, 74년 재공연된 유덕형 연출 '생일파티'는 연출 양식과 배우들의 연기 양식에서 충격적인 현대성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연 스탠리 역을 맡은 신구 선생의 파격적인 연기와 웃음소리는 학생들에게 명연기의 교과서로 회자되었지요. 연극배우 신구의 파격적인 연기는 72년 '야간비행'이란 TV 드라마로 이어졌고, 그 이듬해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한 연극배우의 개성적인 연기가 TV드라마와 영화로 이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당연히 신구란 연극배우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그는 TV 드라마와 영화에 머물지 않고 국립극단 배우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더욱 연극배우의 자존심을 지켜준 셈입니다. 연극배우는 언제라도 TV드라마나 영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극배우의 본업은 여전히 연극이다.
지난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연습실에서 신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러시아 연출가 지자코프스키 연출 '벚꽂동산'에 참여하고 계신답니다. 지금 TV드라마다 영화다 광고다 해서 바쁘실 텐데, 주연도 아닌 조연으로 연극무대를 지키시는 모습에서 여전한 연극배우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72년에 기획된 몰리에르 페스티벌은 70년대 한국연극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보여준 최고의 페스티벌이었습니다. 오태석 선생이 '스까펭의 간계'를 직접 각색 연출한 '쇠뚜기 놀이'는 전통의 재창조란 연극적 화두를 분명하게 보여준 문제작이었습니다. 올해 칠순을 맞으신 이호재 선생이 당시에는 무대를 가로지르는 줄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연기를 했습니다. 전무송 선생은 긴 작대기에 발을 얹고 껑충껑충 돌아다니셨는데, 그 모습이 하도 위태하고 안쓰러워서 공연 내내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쇠뚜기 놀이' 출연진 모두가 엄청난 훈련과 연습량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위선의 흥정'(김정옥 연출ㆍ극단 자유)은 몰리에르의 '따르뛰프'를 별스런 각색 작업 없이 제목만 바꾼 연극이었습니다. 추송웅 선생이 맡은 사기꾼 따르뛰프 역은 성격배우의 전형을 보여준 화제작이었습니다. 자신은 단 한번도 웃지 않으면서 관객들을 계속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사기 행각이 들통나자 따르뛰프 추송웅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열쇠 꾸러미를 던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뇌까립니다. "다음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 완벽한 마무리 연기에 탄성을 내지르며 울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아, 연기라는 것이 저렇게 인간을 뒤흔드는 힘이 있구나. 배우는 참 대단한 존재구나 하는 확신을 준 공연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추송웅이란 배우가 우뚝 서 있었고, 그는 무엇보다 부산 사람이었습니다. 억센 부산 사투리가 여과 없이 튀어나오는데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뿜어대는 에너지에 저는 숙연해졌습니다. 나도 저런 배우가 되리라.
이진순 연출의 '수전노'도 재미있었습니다. 수전노 역은 박근형 선생이 맡았는데 그렇게 인색한 수전노 역을 잘 해 내는 배우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70년대 초 남산에는 극장만 있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센터에서 고정 수입원으로 세를 내준 남산 예식장과 남산 다방이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인들만 모여 작업하는 곳에 주말이면 난데없는 결혼식 하객들로 득실거렸습니다. 남산 다방에는 다양한 손님들이 드나들었습니다. 한 건물에 한양스튜디오가 있어서 영화배우들이 녹음하러 들락거렸습니다. 드라마센터 바로 위에 KBS-TV 스튜디오가 있어서 TV연기자들도 다방에 드나들었습니다. 드라마센터 길 건너 바로 위쪽에 영화진흥공사가 있었고, 드라마센터 아랫길이 바로 충무로입니다. 대한극장을 중심으로 길 건너 라이온스호텔과 청조다방이 있었습니다. 제 첫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청조다방의 좌장이셨던 윤삼육 선생이 뽑아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밤 새워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하기 위해 묵은 곳이 별 두 개짜리 라이온스호텔이었고, 충무로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 실내에는 일거리를 기다리는 배우와 영화 스탭들로 흥청거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남산 다방에 죽치고 살았습니다. 남산다방에는 강원도 출신 설 양이 종업원으로 있었는데, 이 마음씨 고운 아가씨는 연극배우들에게는 커피 주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을 가져다 주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냥 돌아가는 것이지요. 밤 늦게 연습하고 돌아갈 곳이 없는 학생들이 문을 두드리면 다방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70년대 남?드라마센터 주변에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연극 영화 TV 드라마 종사자들이 허물없이 어울렸지요. 지금 남산에 다시 남산예술극장이 문을 열고, 그 뒤편에 시설 좋고 값싼 남산연습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습니다. 배우들이 죽치고 있을 찻집도 없고, 녹음 스튜디오도 TV 스튜디오도 영화진흥공사도 다 떠났습니다. 충무로에 대한극장은 존재하지만 영화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고립 분산적인 21세기 디지털 문명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남산의 예술적 정취도 사라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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