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 보였다. 슬쩍 들뜨기도 했다. 웃음기엔 피로가 묻어났고, 말엔 조바심이 배어있었다. 밝은 또순이 이미지의 그녀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절친했던 친구 동생 고 최진영의 비보만이 그의 마음을 누르는 듯 하진 않았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의식과 흥행에 대한 책임감 등 복합적인 감정이 동시에 그를 압박하는 듯했다.
지난 9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정화는 웃음을 잃지 않았으나 얼굴엔 불안감이 스쳤다. 인기작가에서 표절작가로 전락하는 영화 '베스트셀러'(15일 개봉)의 백희수처럼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는 공포에 휩싸여야 했던 주인공의 어둡고 눅눅한 감정을 여전히 벗어 던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미스터리물을 표방한 '베스트셀러'는 스릴러와 공포를 껴안고 있다. 표절의 불명예를 떨쳐내기 위해 시골의 한 별장을 찾은 희수가 딸이 전해준 이야기를 소설로 옮기는 과정엔 공포의 섬뜩함이, 별장에 얽힌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들이 희수의 목숨을 위협하는 장면에선 스릴러의 긴장감이 각각 스크린을 장악한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절정이 결말로 치닫는 대목엔 스릴러와 공포가 공존하며 관객의 숨통을 쥐려 한다. 수작이라 선뜻 손 들어줄 순 없는 영화지만 허술한 만듦새는 아니다.
엄정화에게는 오랜만의 단독 주연작이다. 지난해 1,000만 영화 '해운대'와 '오감도', '인사동 스캔들'로 부지런히 극장을 찾았지만 모두 조연 신분이었다. "다작이라고 오해하는 분도 있지만 제대로 된 주연은 2006년 '미스터 로빈 꼬시기'이후 처음이에요." 그는 "시나리오를 읽기 전부터 여자 원톱이란 점에 마음이 끌렸다. 굉장히 반가운 시나리오였고, 읽고선 이틀 뒤 바로 감독을 만났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영화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또 부담스럽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여러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종잡을 수 없는 심리를 드러내는 희수는 엄정화의 호연을 통해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때론 넋을 잃고, 때론 광기에 사로잡히는 모습이 서스펜스와 공포를 자아낸다.
"현장에서 괴로운 감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힘들어하는 모습을 위해 다이어트도 해야 했어요. 저는 정말 평소에 먹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찍을 수가 없더라고요. 거의 먹지 않고 아주 예민한 감정을 이어가려 했어요."
주연자리를 오랜만에 꿰찼다고 하지만 그는 행복한 여자배우 축에 속한다. 또래 여배우들과 달리 전문직 여성역을 주로 맡으며 일감이 끊이지 않는 편이다. 관객들의 뇌리에 여전히 젊고 활동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 더구나 요즘 영화란 영화의 주연은 남자들이 틀어쥐고 있는 형국이라 그의 활동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도 "이젠 앞으로 어떤 역할과 배역을 어떠한 마음으로 맞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며 나이의 한계를 인정했다. "이번처럼 아이가 없어도 엄마 역할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듯 해요. 제 역할도 이제 한정되는 것이 맞죠. 억울하고 서운한 감정은 느끼지 않아요. 연륜이 쌓이니 연기가 달라지는 듯 해요. 감정의 폭도 넓고 깊어진 듯해요. 나이 들어서 좋은 유일한 점인 것 같아요."
아무리 나이가 나이라지만 그는 댄스가수의 입지까지 잃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다음 앨범에서도 댄스가 빠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이 생각하라'는 그런 반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20~30대 시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아이돌과 경쟁할 생각은 없어요. 많지 않지만 저를 기다리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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