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1> 다시 대학으로 돌아오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1> 다시 대학으로 돌아오다.

입력
2010.04.13 08:01
0 0

누구나 사회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물러나 한가해지면 무력증에 빠지게 된다. 비서실에서 일정을 짜주고 전화도 받아주고 모든 잡무를 처리해주었는데 이제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자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해 사회생활에 무능력자가 되기 마련이다. 외출할 때면 차와 운전기사가 없으니 손수 운전을 하고 차량정비도 해야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려면 남들이 초라하게 볼까 봐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러한 무력증은 바쁜 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높은 직위에 있은 사람일수록, 군인이나 공직자처럼 권위적인 직종에 있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심하다.

나는 대학교수가 본직이었고 공직 경력도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무력증은 크지 않았다. 대학교수는 전형적인 비 권위적 자유업이고 방학이 있고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 속에서 분초를 쪼개 쓰는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집에 앉아 있으니 상당기간 무력증을 느꼈다. 동사무소에 호적초본을 떼러 갔다가 직원이 동장실로 안내해 곤혹스러움을 겪은 뒤로는 동사무소 가기도 거북했다. 동네 목욕탕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어쩐지 부자유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이러한 무력증에서 벗어나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내가 1989년 7월 건설부 장관직을 그만두고 얼마 되지 않아 노태우 대통령은 이런 저런 자리를 청와대 수석이나 총무처 장관을 통해 권해왔는데 나는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뒤 이규성 재무부 장관을 통해 대학교수와 겸직할 수 있는 은행 이사장 자리나 금융통화위원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대통령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러나 대학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이 관변을 기웃거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나의 생각을 대통령께 전해 달라고 했다.

대학 강단에 다시 서기 위해서는 한 학기 정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교수로의 복직은 다음 해 봄 학기에 하기로 대학의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바로 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경제발전론> 전면개정판 집필에 들어갔다. 이 책은 내가 1974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중앙대 교수로 전직하면서 1977년에 펴낸 것인데 대학교재로 많이 이용되어온 책이다. 펴낸 지 13년이 지나 경제 환경도 많이 달라졌고 새로 추가해야 할 내용도 많아서 절반 이상을 다시 써야 했다. 개정판은 90년 1월에 발행되어 3월 봄 학기부터 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도 수요가 있어 2009년 8월에도 중판을 찍은 바 있다.

그리하여 90년 3월부터 나는 다시 강단에 섰다. 그때까지는 대학교수가 정부에서 장ㆍ차관으로 일한 다음 다른 대학으로 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대학으로 복직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총칼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국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정부에 협력하고 돌아오는 교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일하다가 대학으로 복직하려던 많은 교수들이 학생들의 저항 때문에 복직을 포기하거나 다른 대학으로 간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부의 장관직에서 대학 원위치로의 교수복직은 내 경우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노태우 정권이 국민들의 자유선택으로 출범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민주화가 진전되고 학생들의 저항과 갈등도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교수 연구실에 다시 앉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교수들과 만나 기쁨을 나누고 강의를 마치고는 대포집에 들르는 시간도 다시 찾아 왔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항상 활기차고 순수해 좋았다. 정부에서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학생들과의 대화는 아주 다르다. 대학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만큼 신선하고 밝은 대화는 없다.

봄 학기 나는 대학원 ‘경제발전론’과 4학년 졸업반의 경제세미나 강의를 맡았다. 나는 이들에게 경제정책에 대한 나의 경험담을 곁들여 강의했는데 이러한 현실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 졸업반들의 세미나 시간에는 토지공개념 문제, 경제개방과 세계화 문제, 금융실명제 문제, 주택과 부동산 정책, 수도권 집중문제 등 주요 정책이슈들을 골라 강의해 주었는데 그 뒤 취업시험과 면접에서 이 때의 강의가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경제학과 졸업반 학생들의 취업을 알선지도 하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현대 대우 등 일부 대기업과 몇몇 증권회사의 협조를 얻어 우수학생을 엄선하여 보내곤 했다. 학기가 끝날 무렵 종전과 같이 내 과목에 대해 학생들의 평가를 받아 보았는데 예전처럼 좋은 반응이었다.

내가 대학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가정도 여유 있고 평안한 생활로 돌아왔다. 교수로서 나의 월급은 93년 9월의 경우 세후 360만원으?장관 월급보다는 약간 적었지만 강연료나 원고료 등 부수입이 있고 공금용도로 빠져나가는 것은 없어져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가족과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아져서 자주 등산이나 여행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겨울 방학에는 미국의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친지와 친척들도 찾아보고 귀로에는 하와이에 들러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