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주식을 산 때까지, 나는 인생을 낭비했다."
최고의 갑부 워런 버핏을 이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 또 있을까. 남들이면 이미 은퇴했을 여든 나이까지 '투자의 귀재'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고 있는 버핏은 오로지 투자에 대한 열정으로 일생을 살아 왔다.
사실 버핏의 첫 '비즈니스'는 6살 때 시작됐다. 껌과 콜라 등을 이웃에 팔아 한푼 두푼 모은 이 꼬마는 10살 때 '1,000 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35세에는 백만장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첫 주식투자는 11살 때. 그러나 투자성과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직접 모은 '전 재산' 120달러에 누나 도리스의 돈을 보태 '시티즈 서비스' 회사 주식을 주당 38.25달러에 샀지만, 주가는 이내 27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얼마 후 주가가 40달러로 회복되자 버핏은 재빨리 팔아버렸는데, 이 주식 가격은 곧 200달러로 치솟았다. 조급증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개미투자자들의 실수를 그 역시 경험한 셈이다. '좋은 주식을 오래 보유한다'는 장기투자, 가치투자의 철칙도 이런 실패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하원의원이 된 후에도 그는 계속 돈을 모은다. 신문배달에 동전ㆍ우표 수집은 물론 중고 핀볼 기계를 이발소에 설치하거나, 심지어 골프장 호수에 빠진 공을 건져내 팔기도 했다.
버핏은 투자에 대해서라면 신문이든 잡지든 뭐든지 읽고 연구했다. 신문배달 역시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매일 최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신혼여행 때도 무디스가 발간한 기업 보고서를 들고 갔을 정도. 그는 지금도 비행기에서 창 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대신 신문을 읽는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입학 후 가치 투자의 창시자로 알려진 벤저민 그레이엄 교수의 눈에 띈 것 역시 그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 를 거의 달달 외우고 있었기 때문. 그레이엄으로부터 유일하게 A+ 학점을 받은 수제자였던 버핏은 졸업 후 그레이엄의 투자회사에 들어가 일했다. 그레이엄 은퇴 후 후계자 권유를 받았지만 고사한 채 고향인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로 돌아온다. 현명한>
1956년 25살이었던 버핏은 자기 돈과 지인들의 투자금 등 17만달러로 투자회사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십'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저평가된 회사의 주식을 사 모은 후 수익을 배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투자하는 복리 방식으로 돈을 불려나갔다. 당시 다우지수 상승률은 연 평균 7.4%였는데, 버핏은 이 회사를 통해 매년 29.5%에 달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버핏이 단순히 주식매매차익만 노렸다면 지금 같은 갑부는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회사를 인수하거나 경영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 상당한 지분을 획득, 주식의 가치를 직접 높이는 전략을 택했다. 62년 그가 인수했던 버크셔 해서웨이는 당시 주가가 18달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1만달러가 넘는다.
그는 돈 쓰는 데 유난히도 인색했다. 엄밀히 말하면 돈 쓰는 것에 대한 발상 자체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그는 기본적으로 '100달러를 어떻게 쓸까' 대신 '100달러로 투자하면 얼마를 벌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버핏은 수십 년전 3만달러를 주고 산 집에 지금도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3만달러를 10년만 굴렸으면 100만달러가 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까워한다고 한다. 세계 최고 부자이면서도 자녀에게 돈을 그냥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빌려달라는 딸에게는 "대출은 은행에서 받으라"고 말했을 정도. 이 때문에 그는 상속세 폐지론에도 적극 반대한다.
하지만 그도 2004년 부인 수전이 뇌졸중으로 숨지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녀에게 용돈도 주기 시작했고, 기부도 늘렸다. 특히 2006년에는 재산의 85%를 빌 게이츠 MS회장이 세운 '빌&멜린다 게이츠'재단에 기부하겠다는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돈을 모으는 것뿐 아니라 쓰는 데도 모범을 보인 덕분에 그는 '누구에게나 존경 받는 부자'의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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