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들의 나라, 올림픽의 나라,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이 넘쳐나는 나라. 하지만 역사와 낭만이 어울러진 이 발칸 국가는 지금 사상 초유의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다. 지난 2월 이후 세계 경제의 뇌관이 되어버린 그리스 재정위기다.
지난 달말 유럽 정상들이 모여 이 나라 경제를 살리는 방안에 합의했지만, 시장은 여전히 불안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의 국채가격은 현재 사상 최저수준으로 곤두박질친 상태다. 지금 같아선 제우스도, 아니 다른 수많은 신들조차 고향 그리스를 외면하는 듯 하다. 무엇이 그리스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지원안은 나왔지만…
그리스의 국가부도 우려가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해 10월, 2009년 재정적자 전망치가 당초 3.7%에서 12.5%로 대폭 수정 발표되면서였다. 이어 그리스가 재정긴축 방안을 내놓았지만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시장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2월 무렵부터 불안감은 위기감으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그리스 사태의 해결 방안을 놓고 16개 유로지역 회원국들은 긴 논란과 공방 끝에 지난달 25일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리스가 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할 수 없을 경우 ▦한편으론 회원국들이 ▦다른 한편으론 국제통화기금(IMF)이 자금지원을 한다는 이른바 '투 트랙' 방안이었다. 다만, 도덕적 해이 방지차원에서 자금지원 시 엄격한 대출조건을 부과하고 지원금리 역시 시장금리 수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러한 지원원칙이 발표되자 그리스 국채가격은 회복되는 듯했지만, 이내 시장반응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지원내용을 자세히 봤더니 지원시기, 지원규모 및 회원국간 분담 비율, 지원조건 등이 명시되지 않았거나 구체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장신뢰를 얻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가혹한 조건
지원안에 대한 시장 불신이 지속되자 국채 값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두 차례에 걸쳐 국채발행에 나섰지만 헐값, 심지어 목표액조차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4~5월 206억유로의 채무상환이 집중되어 있는 그리스로선,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각에선 이번 지원방안에 대해 "조건이 가혹해 그리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가 재정적자를 2012년까지 대폭 축소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지만, 유럽 국가들은 자금지원 조건으로 추가적인 재정긴축 및 높은 시장금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는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재정사정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또 과도한 긴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노조 등의 반발로 사회불안이 심화될 수도 있다.
이 달 들어 그리스 사태는 더욱 악화되는 모습이다. 불안해진 국민들은 대규모로 예금을 해외로 빼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지난 7일에는 그리스의 4대 은행들이 정부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유럽 내에서 국채발행이 어려워진 그리스는 현재 미국 금융시장에서 50~100억달러의 국채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위기상황이 심각해질 경우, 그리스로선 회원국 및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지원을 둘러싼 회원국 이견이 많아 실제 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적지 않은 난항이 예상된다. 지원금리만 하더라도 독일은 그리스의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시장금리(6~6.5%)를 적용하자고 주장한 반면 여타 회원국은 그리스의 자체해결을 지원하기 위해 저금리(4~4.5%) 대출을 주장하고 있다.
차라리 국가부도가 현실적
현 시점에서 그리스 사태 해결을 위한 선택의 여지는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일반 국가라면 환율이라도 조절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리스가 속한 유로존은 단일통화체제이기 때문에 개별 국가 차원의 환율조정마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할 수도 없는 노릇. '유럽연합(EU)의 일원'이란 사실 자체가 그리스에겐, 약(藥)이자 독(毒)인 셈이다.
이런 구조적 한계로 인해, 일부에서는 "차라리 국가부도를 선언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까지 지적하고 있다.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를 선언한 다음 채무원금감축이나 금리인하 등이 적용될 수 있는 IMF 구제금융을 받는 게, 오히려 그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원방안은 시장의 박수를 받는 데 실패했다. 현재로선 추가적인 획기적 대책도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 점에서 그리스의 위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라 하겠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박진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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