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한 대로 1984년부터 한국사회는 격동하기 시작했고, 도처에서 민주화를 위한 단체들도 생겨나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전략 아래 일사불란한 투쟁이 전개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연대조직 이상의 투쟁지휘부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1985년 3월 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통합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됐다.
민통련의 결성은 너무나 당연한 건데도 민청련과 '종로5가'(기독교운동단체)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반대해 엄청난 진통을 겪었고, 이로 인한 시간과 열정의 낭비도 지대했다. 그들은 'CNP논쟁'의 연장선에서 반대했으나 내막은 주도권 다툼이어서 이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CNP논쟁'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청련과 '종로5가'는 그 해 9월에야 민통련에 합류했다.
민통련이 명실상부하게 운동의 중심이 되자 독재정권은 민통련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사무실을 압수수색해서 홍보물을 압수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주요 간부들을 연행해서 구류를 살렸다. 물론 그런다고 투쟁이 약화되지는 않았다. 이미 투쟁역량이 구축되어 있고 전열 또한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야 운동권도 활발히 움직였지만 국내 정치상황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1985년 2월 김대중씨의 귀국으로 야당 정치권의 활약이 기대된 가운데 2.12총선에서 신생정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한껏 고조되었다. 집회와 시위, 농성은 말할 것도 없고 분신자결 등 격렬한 투쟁도 전개되었고, 그 해 5월에는 대학생 70여명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미국문화원을 점거해서 농성하는 일이 일어났고, 뒤이어 6월에는 서울 구로지역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동맹파업인 '구로연대파업'이 벌어져 노동운동이 사회변혁운동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할 것을 예고했다.
전두환 정권은 다급했다. 학생들의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학원 안정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각계 민주세력의 저항에 직면해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이 약화된 건 아니었다. 민주세력과 전두환 정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었다.
민통련은 학생들의 미문화원 농성투쟁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는데, 나는 민통련의 방침에 따라 오대영 중앙위원과 함께 미문화원으로 갔다. 경찰이 겹겹이 차단하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농성학생들 가까이 갈 명분을 만들기 위해 빵과 음료수를 샀다.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결국 정문까지 다가가 학생들로부터 농성학생이 70여명 된다는 것과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사과 등을 요구한다는 것을 듣고는 격려하는 말을 몇 마디 건넸다. 그랬더니 경찰이 막무가내로 끌어냈다. 미문화원 후문으로 끌고 가서는 나더러 학생들을 선동했다며 경찰서로 연행하려 했다. 자칫하면 구속될 가능성도 있어 나는 경찰의 연행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날 내가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던지 몇 년 전 어떤 기자를 만났더니 그날 내가 경찰의 연행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서 '장기표가 과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게 군사정권의 모략 때문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다고 했다. 나 역시 중부경찰서까지 어떻게 연행되어 갔는지를 몰랐으니 나의 행동이 무척 과격했던 건 분명했다.
그런데 한가지 밝혀둘 일이 있는데, 나는 학생들의 미문화원 농성투쟁을 격려했지만 반미주의자는 아니었다. 나는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며 반미자주화투쟁이 최우선 과제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이 미국에 예속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문화원 농성투쟁을 격려한 것은 8.15해방 이후 그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든 또 미국으로부터 받은 혜택이 얼마가 되든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받거나 미국에 뺏긴 것도 많은 터에 '혈맹'만 강조되고 미국에 대한 규탄은 없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문부식·김은숙 등에 의해 감행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도 민족자존을 위한 쾌거로 보았다.
아무튼 중부서에 연행된 나는 29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으나 정식재판을 청구해서 10일만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날 서울대학교에서 미문화원농성투쟁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열렸다. 나는 이 집회에 참석해서 농성학생들을 만난 일을 전하고 학생들을 격려하고 싶었다. 그런데 경찰이 학생들의 집회를 봉쇄해서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봉쇄망을 뚫었다. 그날 나는 관악산을 넘었다. 오후 2시 집회에 1시 반쯤 도착했는데 이미 만 명 이상의 학생이 모여 있었고,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80년 서울의 봄 이후 최대의 집회였다.
집회 시작까지 여유가 있어 나는 학생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집회장소로 갔는데, 곧바로 연설하게 되었다. 내가 학생운동의 신화쯤으로 여겨지던 때였던 데다 미문화원 농성학생들을 격려하러 갔다가 구류까지 살고 나왔으니 연단에 서자마자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이날 미문화원 농성학생들을 격려하러 간 경위와 농성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소개하면서 이 요구사항이 관철될 수 있도록 함께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는, 정치 후진국에서의 학생의 정치적 지위와 사명 등 평소 학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힘주어 말했다. 나는 시중에서 3,000원 하는 밥을 학생들은 학생식당에서 1,000원만 내고 먹을 수 있는 현실을 거론하며, 학생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는 바 이 특혜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보전된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학생들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역설했다.
아무튼 이 연설이 있고서 20년 이상 지나고도 이 연설을 들었던 학생들로부터 무척 감동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당시 내가 대단히 열정적이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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