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꿈이 있어야 천직(天職)을 지킬 수 있지 않겠어요."
8일 지방기능경기대회 양복종목에 출전한 전면규(55)씨의 말이다. 1992년부터 기능경기대회에 참가한 전씨는 지방기능경기대회만 17차례 출전했다. 3위권에 들어 전국기능경기대회도 7번 출전했지만 번번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24전25기를 위한 도전이다. 1966년부터 시작한 기능대회는 올해로 45회. 7일부터 12일까지 전국 16개 시도에서 열리는 올해 지방기능경기대회에는 56개 종목에 9,878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전씨가 경쟁하는 대전지역 기능대회 양복부문의 경쟁자는 모두 9명. 하지만 전씨는 "꼭 입상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계속 자극을 받고 배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은 밥이다
좌절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건 그의 삶의 방식이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서 촌부의 아들로 태어난 전씨는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열여섯 나이에 논산으로 나가 양복점 '시다' 일을 시작했다. "친구들이 공부할 때 나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셈이죠. 눈치밥도 함께지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주는 이 일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교복 입은 또래를 보면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양복점 '시다'로 일하던 70년대는 대전시내에 500여 개의 맞춤 양복점이 있었을 만큼 호황기였다. 양복 기술은 그에게 일한만큼의 밥을 돌려줬다. 27살이던 1982년 마침내 대전시내에 자신의 양복점을 열었다. 부럽기만 했던 또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사장명함을 가지게 됐다.
장인(匠人)을 향한 꿈
"하나하나 작업을 해 나가다 보면 양복의 미감에 경이를 금치 못했죠. 한 사람만을 위한 양복을 완성하고 몸에 잘 들어맞는 걸 볼 때 기분은 아무도 모릅니다."
세세하고 꼼꼼한 성격인 그에게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맞춤양복 생산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옷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예술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게 전씨의 지론이다. 현재 대전시내에 남은 양복점은 50여개. 기성복에 밀려 하나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나은 옷, 완벽한 양복을 만드는 꿈을 버릴 수 없다.
아쉽게도 그의 기능대회 출전은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매년 출전자가 줄어 양복종목은 올해를 끝으로 기능대회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씨는 "기능대회가 없어지더라도 다른 경진대회에 출전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는 것이다.
전씨는 이처럼 기능경기대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시들해지는 추세가 못내 아쉽다. 사실 1970~80년대 국제기능올림픽 대회 입상을 하면 귀국해 청와대를 방문하고, 카 퍼레이드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기능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불렸다. 이런 뒷받침이 있어 우리나라는 국제기능대회에 25번 참여해 16번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전씨는 "지금까지 우리 양복업계 기술이 발전한 것도 기능경기 대회가 있어서였는데, 양복 기능인들의 꿈과 희망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아파했다.
김청환 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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