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모자를 쓴 지진희는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캐주얼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수염은 '임금님 표'. 아래로 향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위엄 어린 콧수염과 턱수염은 그가 최근 맡은 역할을 웅변했다. MBC 월화드라마 '동이'의 조선 숙종을 연기하고 있는 그는 저녁 '수라상' 메뉴로 카레라이스를 선택했다. "파스타를 먹다가 수염에 걸리면 분장을 다시 해야 하고 곧 있을 밤 촬영에 방해가 된다"며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만인지상의 인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지만 그는 8일 개봉하는 코미디영화 '집 나온 남자'(15세 이상 관람가)에선 한 없이 망가진다. 맡은 역할은 유명 음악평론가 지성희.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출연 중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동해로 달려가는 폼생폼사의 인물이다. 영화 제작사 스폰지ENT가 '명품 초딩'이라 정의 내릴 정도로 참 비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자신이 이혼통보를 하기도 전 아내 영심(김규리)이 가출을 감행했다는 것에 부아가 치밀어 아내를 찾아 나선다. 단지 "왜?"를 묻기 위해서다. 엄마 아빠를 입에 달며 녹용으로 사람을 패는, 숙종을 감히 떠올릴 수 없는 웃기는 남자다.
"나이 먹고 굉장히 망가진 느낌이 드는 영화다. 주인공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2006)을 함께 했던 이하 감독이 나에게 받은 느낌을 토대로 만든 캐릭터다. 나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라 그런지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고, 출연을 결정했다. 진지하고 중후한 내 이미지를 깨는 게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웃긴 이미지면 숙종 역할을 못하지만 나 같은 경우 코미디도 할 수 있고, 호러도 가능하다."
성희의 '아내 찾아 삼만리' 여행엔 후배 황동민(양익준)이 동행한다. 아내의 옛 연인이자 성희의 오랜 지기다. 둘은 '덤 앤 더머'의 두 주인공처럼 한심한 행각을 벌이며 영심을 찾아 나선다. '집 나온' 두 사람의 연기 앙상블은 영화를 썩 잘 만든 유쾌한 코미디로 격상시키는 데 한몫 한다.
"'똥파리'로 양익준을 보고선 '뭐 저런 인간이 있나'하는 생각에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실제 보니 너무나 귀엽고 섬세하더라. 한성중학교 후배여서 금세 친해졌다. 영화 속에서 동민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부담도 덜했고… 둘이 애드리브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감독님이 '컷'을 외치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사가 매 장면 녹아들었다."
두 남자는 여행 중에 영심이 한때 술집에서 일했고, 남자 때문에 손목을 칼로 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는 피라미드 판매에도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까지. 그들의 해괴망측한 여행에 합류하는 영심의 제비족 오빠 유곽(이문식)의 존재까지도 그들은 뒤늦게 알게 된다. 아는 것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수컷이란 역시….
"일종의 성장영화다. 세 남자가 여행을 같이하며 조금씩 정신적으로 커나가게 된다. 그래서일까. 세 남자가 술 마시며 캠코더에다 영심을 향해 인사말을 건네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정신적 성장의 느낌이 있어 가슴이 짠하다."
그의 나이도 이제 서른 아홉. 늦깎이란 소리를 들으며 1999년 데뷔한 지도 벌써 11년이 흘렀다. 그는 "굉장히 오랜 시간 생각해 선택한 일이니 미련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난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작할 땐 10년 뒤 정상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노력했다. 지금 정상은 아니지만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술도 끊고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겹치기 출연? 주연급으로 일하면서는 절대로 안 할 거다. '동이'가 끝나는 10월까지 다른 작품은 생각지도 않는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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