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얘들아, 환경 지키자" 할머니가 나섰다/ 부천 오정복지관서 9명 모여 '환경 교육가' 도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얘들아, 환경 지키자" 할머니가 나섰다/ 부천 오정복지관서 9명 모여 '환경 교육가' 도전

입력
2010.04.09 05:20
0 0

임영월(62) 할머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95년 찢어지는듯한 복통에 대학병원을 떠돌았지만 방광경화란 진단을 받은 건 13년 뒤였다. 정확한 병명을 몰라 심장 자궁 등 세 차례나 수술을 했고, 30년 운영한 미용실 문도 닫았다. 다행히 몸은 조금씩 회복돼 갔지만 삶이 허물어진 터라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을 장소와 방법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죽을 날만 고대하던 임 할머니는 2008년 말 우연히 옆집 할머니가 복지관에서 동화구연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 임 할머니는 "삶의 활력을 봤다"고 했다. 그 뒤 그는 동화구연을 배웠고, 복지관에서 지정해주는 어린이집을 찾아 다니며 아이들에게 동화를 구수하게 읽어줬다. 최근엔 환경뮤지컬에서 '정의로운 개구리'역을 맡았다. '동화 할머니'에서 한발 더 나아가 '환경 교육가'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임 할머니뿐이 아니다. 최은희(63) 장준례(79) 임영월(62) 이명옥(55) 최현수(58)씨를 비롯해 모두 9명은 미용사, 경리, 재봉사, 주부 등 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환경을 지키겠다는 일념만큼은 닮았다.

이들은 어린이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래세대 환경교육가로 일하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교육을 받았고, 최근 첫 수업을 진행했다. 지금껏 배운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어린이 대상 환경뮤지컬도 준비해 17일 공연을 앞두고 있다. 예전엔 "이산화탄소는 뭐에 쓰는 물건이냐"고 묻던 70대 할머니까지 나선 환경교육과 뮤지컬이 궁금했다.

7일 오후 경기 부천시 오정노인복지관 소강당. 뮤지컬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레이스 치마에 분홍색 가발을 눌러쓴 '요정1' 역의 이명옥(55)씨가 대사를 이어갔다. "저는 쓰레기 대장을 물리치기 위해 마법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온… 아니 마법의 소리를… 연주하러 온… 아이구, 뭐였지?"

배우들은 흥분으로 한껏 들떠있었지만 연기는 아슬아슬했다. 젊은 연출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틀려도 괜찮으니 천천히 하세요. 그리고 한 분이 말씀하고 계실 때 상대방은 반응을 해주셔야 해요." 할머니들이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할머니들의 환경뮤지컬 '쓰레기 괴물과 환경지킴이'는 무지개 요정과 정의로운 개구리가 관객의 힘을 빌려 평화로운 지구에 나타난 쓰레기 대장을 물리친다는 내용의 어린이 대상 창작뮤지컬이다. '지역사회에서 존경 받는 노인상'을 모색하던 오정노인복지관이 기획한 뒤 동화구연을 하는 할머니들에게 제안했다. 어린이를 위한 봉사라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기꺼이 나섰다. 할머니들은 5명의 배우와 4명의 스텝으로 팀을 꾸린 뒤 올 1월부터 매주 1회씩 복지관 강당에 모여 연습을 했다.

뮤지컬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자신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임영월 할머니는 "이렇게 들썩이며 몸을 움직인다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나는데, 아이들에게 환경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다니 기쁘기만 하다"고 말했다. '졸병' 역을 맡은 최고령 배우 장준례(79) 할머니도 "이 나이에 아이들에게 유익한 공부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할머니들의 환경교육은 비단 뮤지컬 공연에 그치지 않는다. 5일에는 부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미래세대 환경교육' 첫 수업을 열었다. "햄버거 대신 콩을 많이 먹으면 소와 나무를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게 교육의 핵심. 무엇보다 이들이 선보인 율동과 동화구연은 아이들의 귀여움에 뒤지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2~5세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수 돋보기를 써가며 만든 콩목걸이도 선물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할머니의 콩목걸이에 큰 호응을 보냈다. 지난 6개월간 동화구연, 생태교육, 기후변화, 유아 집중시키기 등을 훈련해온 보람이 있었던 셈.

처음엔 할머니들도 '환경'이라는 주제가 낯설었을 법하다. 이명옥(55)씨는 "처음에는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환경교육을 시작했는데 막상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공부를 하다 보니 내가 더 환경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최현수(58)씨는 "30년을 주부로 살면서 장바구니를 필수로 들고 다니고, 절대 음식을 버리지 않는 엄마들이야말로 원조 환경운동가가 아니겠냐"고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들의 뮤지컬은 17일 오후 2시 경기 부천시 오정아트홀에서 막을 올린다. 관람은 무료지만 선착순 입장이라 서둘러야 한다. 문의 (032)683-9290.

할머니들의 다음 목표는 5월에 열리는 거창 실버연극제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