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두고 민감한 정책이 속도조절 양상을 보이는 것이 결코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현 정부 임기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 개혁 정책들을 무작정 뒤로 늦췄다가는 아예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전문자격사 제도 선진화는 의사, 약사, 변호사, 회계사, 법무사 등 내로라하는 '사(士)'자 직종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 그만큼 추진에 걸림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피로회복제 등 일반의약품(OTC)의 약국 외 판매, 영리법인 약국 허용 등으로 '밥그릇'을 많이 빼앗길 것으로 우려되는 약사들의 저항이 가장 거세다. 작년 11월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의약 분야 공청회를 개최하려다 약사들의 무력 반발에 밀려 공청회를 연기해야 했을 정도다. 특히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의약품 남용 등을 이유로 약사들 편에 서 있어 부처간 조율도 쉽지 않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전문 자격사들의 막강한 로비력 등을 고려해보면, 칼을 빼들었을 때 강력히 밀어 붙었어야 했다"며 "선거 이후엔 오히려 추진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기업 표준 연봉제 및 임금피크제도 잘못 다뤘다간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화약고다. 같은 직급이라도 직무와 성과에 따라 연봉이 최대 30% 차이가 나도록 하고, 이런 성과 연봉제를 도입한 공공기관에 한해서 제한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한 정년연장을 인정해주겠다는 것이 골자. 자칫 노동계 전체가 들고 일어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작년 10월 이후 벌써 수차례 발표를 미뤄왔을 정도다. 한 공공기관 노조 관계자는 "일률적인 연봉제와 정년연장 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노조의 존립과도 연관된 문제"라고 반발했다. 정부 측은 여전히 "이른 시일 내에 발표하겠다"고 하지만, 결국엔 선거 이후로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유재산 관리체계 강화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이유로 정부가 올해 역점 추진 사업으로 내놓은 사업. 여러 부처에서 나눠 먹기 식으로 관리하면서 이리저리 방치돼 있는 수십조원대 국유재산에 대해 범정부적인 통합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국방부를 비롯해 특별회계기금을 관리하는 부처들의 반발이 거세 불과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처지다. 재정부 관계자는 "선거를 앞두고 제대로 조율도 안 된 안을 불쑥 내밀었다가 분란만 가중될 수 있다"며 "상반기 중에 처리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LH(토지주택공사)의 혁신도시 이전 문제는 선거에 미치는 파장이 매우 직접적이다. 통합 전 토지공사(전주)와 주택공사(진주)의 이전예정지 중 어느 곳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인데, 탈락한 지역의 민심은 180도 등을 돌릴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 지금은 두 도시를 넘어 전북과 경남의 대립 양상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국토해양부는 'LH 지방이전 협의회'를 3차례나 열고 "양쪽이 만족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전력 질주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일단 선거 뒤로 미루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농협법 개정이나 쌀 조기 관세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회 농식품위는 이달 중순 농협법 개정안 재심의에 나설 예정이지만, 통과 전망은 밝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전국 농협 조합이 1,000개가 넘고 조합원 수도 250만명에 달한다"며 "굳이 이 시기에 불쏘시개로 들쑤시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정부는 쌀 조기 관세화 역시 국제 쌀 가격 상승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지만, "굳이 선거 전에 이슈화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속도 조절에 나서는 모습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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