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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1> 불의에 항거한 민중의 첫 승리-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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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1> 불의에 항거한 민중의 첫 승리-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입력
2010.04.0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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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ㆍ15 이후 해방공간은 어지럽기 그지없던 세상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2년의 독재는 민중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한 불행한 시대였다. 이런 민중의 질곡을 뚫고 새 역사의 장을 연 4ㆍ19는 진정한 민중혁명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자유와 인권이 그렇게 중요한 가치임을 그때에야 모든 국민이 깨달았고, 독재는 그렇게 국민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을 국민은 알게 되었고, 북진ㆍ멸공 통일만 외치던 권력자들의 논리에서 벗어나 평화적 통일만이 진정한 통일임을 국민은 깨닫고 알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4ㆍ19는 혁명이었다.

혁명의 요건을 갖춘 4ㆍ19

그때의 일기를 간추려보자. 1960년 대통령 선거일이 3월 15일인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집권을 노리던 권력자들은 무소불위의 온갖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감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는 터지기 시작했다. 2월 28일 일요일, 야당의 선거 유세에 군중의 운집을 꺼려하여 중고등학생들까지 등교시킨 파렴치한 짓을 하고 말았다. 대구의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4ㆍ19혁명은 불이 붙었다. 그 이후 도처에서 크고 작은 트러블이 속출하면서 마침내 3ㆍ15선거일이 되었다.

경남 마산에서 보다 못한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이때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쓰러졌고 얼마 후 눈에 최루탄이 꽂힌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은 온통 혁명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고려대생의 4ㆍ18 국회의사당 앞 독재타도 시위의 뉴스를 접하고 4월 19일 학교에 등교한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은 의리에 분노한 가슴을 잠재우지 못하고, 교사들의 온갖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타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했고, 곧바로 "대통령 하야하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꼭꼭 잠긴 교문을 무너뜨리고 거리로 진출하였다. 구호를 외칠수록 통쾌한 쾌감은 고조되면서 광주의 주요 거리인 충장로와 금남로를 휘젓고 다녔다.

20년 뒤 1980년 5ㆍ18에도 그랬듯이, 선발대이던 우리는 경찰에 포위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취조를 받던 중 "연행 학생 석방하라"고 외치는 데모대가 경찰서 앞에 당도하자 우리는 그냥 풀려나 다른 학생 데모대와 어울려 시가를 누비며 민중 승리의 새로운 역사적 장을 열었다. 오후에는 시내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혁명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혁명의 고전적인 해석

'맹자'를 읽어보면 천하의 성인 임금 탕(湯)이 걸(桀)이라는 악독한 독재자를 추방해버렸고, 성인 임금 무왕(武王)은 주(紂)라는 불의한 독재자를 정벌하였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맹자에게 물었다. 신하이던 탕이나 무왕이 임금을 추방하고 정벌했는데 그래도 되는 거냐고, 맹자의 답변이 멋지다. "인(仁)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치는 사람은 잔(殘)이라 하는데, 잔적(殘賊)의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재자 즉 독부(獨夫)이니, 독재자를 방벌(放伐)했을 뿐이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는 답이었다.

독재자를 방벌할 수 있다는 유교철학은 진시황 때는 불온사상이라 하여 선비는 땅에 묻고 경전은 불태워버렸다. 한(漢)나라에 와서야 경전 해석을 다시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산 정약용은 '탕론(湯論)'이라는 무서운 논문으로 정리하여 잘못된 임금이나 독재자는 백성의 힘으로 언제라도 유폐시키거나 정벌할 수 있다는 논리를 확정하였다.

이처럼 긴 역사를 지닌 방벌론이지만 역사적으로 승리한 혁명은 거의 없었다. 이런 유교철학을 믿고 국왕에 덤볐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어간 실패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조선시대에도 많았다. 인조 때의 이괄, 영조 때의 이인좌, 순조 때의 홍경래, 그들의 최후는 너무나 비참했다. 좋은 정치(善治)란 그렇게 드물었고, 혁명은 성공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임금을 바꿔치기하던 반정(反正)도 어려운데, 혁명은 말해 무엇하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쫓겨났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도 쫓겨났지만, 그거야 자리바꿈이지 본질적인 변화야 없었지 않은가. 고려를 세운 왕건이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 '탕론'의 승리이기도

중종반정, 인조반정의 정치적 타당성은 역시 탕왕이나 무왕의 방벌론과 무관하지 않았고, 이괄, 이인좌, 홍경래도 그런 유교철학과 관계가 없지 않았다. 왕건이나 이성계도 역시 그런 방벌론에 그들의 역성(易姓)혁명의 정치적 명분을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맹자' 방벌론의 주석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탕이나 무왕과 같은, 인의(仁義)의 정당성을 지닌 혁資?주체세력이 걸주 같은 패악한 폭군이나 독재자를 방벌할 때에야 혁명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쿠데타는 그래서 집권의 정당성을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4ㆍ19혁명이야말로 가장 의롭고 정당한 민중이 주체가 되어, 가장 패악한 독재자를 추방했던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본질적인 혁명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우리나라로만 본다면 4ㆍ19혁명은 맹자의 방벌론 이후 2,000여 년, 다산의 '탕론' 이후 160여 년만에 마침내 탕무의 방벌론이 역사적 승리를 얻어 낸 혁명이었다.

다산의 '탕론'은 맹자의 논리에서 더 발전된 논리였다. 악독한 독재자의 추방이나 유폐는 탕무에서 시작된 논리가 아니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皇帝)라는 황제(黃帝)때 부터 시작된 일이니, 방벌은 바로 역사의 시작부터 있었던 옛날부터의 전통과 정통성을 지닌 원리라고 말했다. "옛날의 도리(古之道)"라고 선언하여 역사 원리이자 정치 발전의 본질적인 논리라고 역설했다. 방벌의 역사가 없는 한 역사는 발전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민중의 추대에 의하여 대통령 지위를 얻었다면(衆推而成), 민중이 추대해주지 않는다면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함은(衆不推之而不成) 당연한 일이니, 민중들이 하야하라고 외친다면 당연히 하야해야 한다고 했으니, 다산은 그때 '탕론'을 통해 이승만의 하야를 벌써부터 주장한 셈이다.

5ㆍ18 이어 6ㆍ10으로

스크랩을 뒤지다가 30년 전인 1980년 4ㆍ19 20주년을 회고하는 신문에 게재했던 글을 찾았다. "근래(유신시대)에 4ㆍ19기념식이 없어졌지만 오늘로써 20년이 지난 4ㆍ19야말로 이 나라 민중이 성취해낸 피어린 민중저항권의 생생한 승리의 기록이다. 우리 세대가 그동안 갖은 시련을 겪어오면서 한오라기의 희망이라도 지니고 용기를 잃지 않은 힘은 오직 4ㆍ19정신 그것과 그때의 승리감이 주던 덕택이었으니, 4ㆍ19혁명정신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키워준 밑거름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던 그때의 이야기였다. 4ㆍ19 직후 들어선 군사정권의 독재와 싸웠던 6ㆍ3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교련 반대, 월남파병 반대, 유신 반대의 그 기나긴 투쟁에서 용기를 지닐 수 있던 유일한 힘이 바로 4ㆍ19정신에서, 그때의 그 승리의 쾌감을 잊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5ㆍ18 직전의 80년 분위기는 민주주의를 얻어낼 것으로 여겼지만, 그로부터 전두환 정권 7년,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12년도 싸우고 투쟁하느라 보낸 세월이었으니, 그 세월의 투쟁 의지도 역시 4ㆍ19정신이 도와준 힘이었다. 독재하는 통치자는 언제라도 퇴치시킬 수 있다는 정신, 불의한 정권은 민중의 힘에 의해 넘어지고 만다는 위대한 민주주의 정신을 우리는 4ㆍ19혁명정신에서 배웠다. 20세기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는 4ㆍ19였다. 영원토록 4ㆍ19정신이 살아만 있다면 다시는 이 땅에 독재자가 승리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4ㆍ19가 없었다면 무자비한 계엄군의 총칼 앞에 맨몸으로 당당히 서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학살을 당했던 5ㆍ18민중혁명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4ㆍ19 20주년 직후 광주는 5ㆍ18항쟁으로 일어섰다. 4ㆍ19혁명정신은 5ㆍ18을 낳았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싸우다가 죽어가던 5ㆍ18, 그 힘은 역시 근원이 4ㆍ19였다. 80년에서 87년까지 7년, 싸우고 싸우던 힘에서 마침내 6ㆍ10항쟁의 위대한 승리가 왔다. 그 뒷날이 꼭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6ㆍ29 항복선언은 4ㆍ19, 5ㆍ18, 6ㆍ10의 혁명정신이 식지 않아서 얻어낸 민중의 승리였다.

4ㆍ19 50주년, 세월이야 하수상하지만, 50년의 역사가 있는데,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야 하겠는가. 여러 가지 징후들이 많기는 하지만, 차마 4ㆍ19혁명정신을 짓밟고 감히 어떻게 본질적인 후퇴야 하겠는가. 그 혹독한 유신독재, 그 포악한 5공독재도 4ㆍ19정신으로 무장하고 싸워서 끝내 승리를 쟁취했는데, 깨어있는 우리 국민을 더 이상 누가 어떻게 탄압하겠는가. 맹자가 말한대로, 한 사람의 독재자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신하가 임금 죽였다는 말은 못 들었다는 이야기를 잊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우리 국민은 깨어 있어야 한다. 반세기 동안 4ㆍ19정신으로 살아온 우리 4ㆍ19세대, 이제는 허연 백발만 나부끼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아닌 것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다짐하자.

약력

▦1942년 전남 무안 출생 ▦전남대 법대, 동 대학원 졸업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공동의장 ▦1988~96년 제13, 14대 국회의원 ▦1998~2001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2004~06년 5ㆍ18기념재단 이사장 ▦2005~07년 단국대 이사장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 기행> <某?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다산 정약용의 일일수행> 등 ▦현 한국고전번역원장,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주영 기자 wi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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