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에서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진 전두환 대통령은 단번에 북한을 배후로 단정했다. 전 대통령은 급거 귀국한 뒤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범죄의 원흉으로 전 지구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북한공산집단을 지목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어떠한 단서나 근거도 입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단정이었지만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기가 폭파됐을 때도 곧바로 북한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였고 이 역시 며칠 지나지 않아 사실로 확인됐다.
의심하는 건 경험칙 때문이지만
안보와 관련된 큰 사건이 났을 때 북한을 쉽게 의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칙 때문이다. 이번 해군 초계함 천안함의 침몰도 북한의 소행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그 연장선이다. 북한은 지난해 대청해전에서 패한 뒤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보복을 공언했고, 명백한 열세가 확인된 함포전이 아닌 다른 수단의 보복 공격이 예상돼 왔다.
특히 내부 요인보다는 외부 폭발이나 충격에 의한 침몰의 정황이 굳어지고 있어 북한의 어뢰나 기뢰 공격 가능성이 부쩍 힘을 얻는 형국이다. 천안함이 침몰한 26일을 전후해 북한 서해안 잠수함 기지에서 잠수정 또는 반잠수정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러나 공격 수단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북한의 소행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북한의 잠수정이나 반잠수정에 의한 어뢰 공격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NLL(북방한계선)에서 10㎞ 가량 떨어진 백령도 남쪽까지 침투해 어뢰를 발사하고 흔적 없이 도주할 능력이 북한에 있을지 의심스럽다. 선체가 두 동강났다면 어뢰가 직접 부딪치지 않고 선체 뒤쪽 아래 일정 거리에서 폭발해야 하는데 운행 중인 선박을 대상으로 이렇게 정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할까. 보통 어뢰는 1㎞ 밖에서 발사돼 목표물 도달 시간이 1분 이상 걸리는데 초계함인 천안함의 능력으로 어뢰의 진행소음을 탐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말하는 '인간 어뢰' 공격은 빠른 물살과 짧은 시야로 실종자 구조작업이 힘든 과정을 볼 때 가능성이 희박하다. 잠수정이나 반잠수정을 이용한 기뢰 부설은 백령도 주변의 해저지형과 빠른 조류 등을 감안할 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의 주장대로 자체 추진력을 갖고 부설 위치를 찾아가는 기뢰를 보유했다 해도 천안함이 평소와는 다른 항로를 운항 중이었다는 점에서 천안함의 진로를 예상한 기뢰 부설은 생각하기 어렵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 원인이었다면 남는 가능성은 6ㆍ25때 북측이 설치했거나 1970년대 아군이 북측의 잠수함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했다가 미처 수거하지 못한 기뢰, 또는 북측에서 떠내려온 기뢰 등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이라면 또 다른 문제다.
침몰 초기부터 청와대가 "현재로선 북한 연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거나 "북한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낮다"고 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가 향후 남북관계나 정치적 파장 등 정치적 고려에서 북한 개입 가능성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하지만 북한이 개입됐다는 근거나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청와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근거없는 개입설 부풀리지 말길
천안함 참사 후 국민들의 최대 관심은 북한 관련 여부다. 청와대가 근거도 없이 북한의 개입가능성을 부풀려 국민의 불안이 증폭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국제 금융시장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북한 군사도발과 관련한 한반도 긴장 고조다. 근거와 정황이 명확하지 않은데 북한 개입설을 부풀리면 막대한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북한의 어뢰나 기뢰 공격설에 이어 선체 결함이나 노후화에 따른 '피로 파괴' 가능성 등 수많은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선체 인양 후 정밀 조사가 끝나기까지 단정은 무리다. 섣부른 예단으로 불필요한 불안과 대가를 치를 이유가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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