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100년 만에 건강보험 개혁에 성공하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건보개혁을 반대하는 시민운동 '티 파티' 등은 '오바마=공산주의자'라고 쓴 피켓을 들고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바마가 대선 후보일 적에도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바마는 그때 이런 대답을 했다. "그들은 내가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함께 갖고 놀았다고 '비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이건 차라리 애교스럽다. 오바마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오바마가 한국에서 공산주의자 아니라 '좌파'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어떨까. 문제가 달라질지 모른다. 미국의 납세자들이 세금 추가 부담이 싫어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건보개혁 법안을 통과시킨 오바마를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독재자 혹은 나치주의자라고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특정인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여차하면 "너 한번 죽어봐라"는 의미가 되기 십상이다. '오바마=공산주의자'는 웃어 넘기더라도, '좌파=빨갱이'라는 등식이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좌파 딱지 붙이기가 유행이다. 다른 분야 차치하고, 문화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좌파 타령이 그야말로 시리즈로 이어진다. 집권당인 한나라당의 안상수 원내대표가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에 대해 "현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의 부자 절 좌파 주지를 그냥 두면 되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 최근 버전이다. 24만여명의 신도가 있다는 서울 강남 최대의 사찰 봉은사는 졸지에 '좌파 주지'가 관리하는 '부자 절'이 됐고, 봉은사의 조계종 직영화 문제는 조계종단 내부 이견에 외압설까지 겹쳐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다. 직전에는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한 판 활극을 벌였다. 그는 MBC 이사진 인사를 '좌파 대청소'라고 규정하고는 '큰집'에다 '쪼인트' 운운, 화려한 언사를 월간지 인터뷰에서 쏟아냈다가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말빨'로 '좌빨' 잡으려다 제 발등 찍은 꼴이다.
그런데 안, 김 두 사람을 두고 여권은 물론 언론까지 '설화(舌禍)'라며 "지방선거 앞두고 말조심하라"는 점잖은 충고를 내놓고 있는 것도 우습다. 설화라면 단지 말 잘못한 탓이라는 의미일 텐데, 이들의 '좌파' 발언이 그런 것일까. 말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계산이나 입지에 따라 그 용어를 구사한다는 느낌이다. '좌파'라는 표현으로 "한번 당해 볼래" 하고 호기를 부리는 것 같다. 상대방의 대응도 거칠어진다. 명진 스님은 안 원내대표에 대해 "군대라도 갔다 와서 나를 빨갱이로 몰라"며 그의 병역기피 의혹을 거론하면서 맞받았다. 이쯤 되면 대화나 접점 찾기는 불가능하다. '좌파' 딱지 남발 못지않게 근래 흔히 등장하는 용어가 '포퓰리즘'이다. 입맛대로 포퓰리즘을 갖다 붙이고 공격한다. 내가 하면 정의, 네가 하면 대중영합주의라는 식이다. 이런 사정을 해방 직후의 좌우 이념대립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얼마 전 옛날 신문을 들춰보다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 헛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제5공화국이 시작되던 날의 신문이다. 각 신문 1면에 '4대 국가지표'가 큼지막한 활자로 박혀 있었다.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사회 건설' '정의사회 구현', 훌륭한 목표들에 이은 네번째 지표는 '국민정신 개조'였다. 그때 무슨 정신을 어떻게 개조하겠다는 것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툭하면 좌파나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이들이 혹 여전히 이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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