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최남단 섬 마라도를 오가는 뱃길 옆에 평평하게 누운 섬이 하나 있다. 제주도 서남쪽 끝 모슬포항에서 직선거리로는 2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거친 물살을 돌아가는 뱃길은 4km를 넘는 이 섬 이름은 가파도(加波島)다. 말 그대로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는 뜻이다. 15세기 말 조선 성종 때 이곳에 목마장이 생기면서 사람의 발길이 닿은 섬의 면적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 남짓한 27만여평. 보리농사와 어업이 주업인 가파도의 인구는 한때 1,000명에 육박했으나 지금은 120여 세대 250여명으로 줄었다.
민간 주도 녹색성장 선도모델
제주도 부속섬 치고 이렇다 할 만한 명소는 없으나 본 섬에서 밀려오는 하얀 물결, 4km에 달하는 까만 현무암 해변, 푸른 보리밭 등 가파도의 3대 관광상품은 지난해 2만여명의 손님을 끌었고, 50여기의 고인돌과 패총 흔적 등 선사시대 유적도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인근 마라도와 짝을 지어 '이곳에선 돈을 빌리면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는 우스개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작고 한적한 이 섬에서 최근 흥미로운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탄소 없는(carbon-free)' 생태관광지로 마을을 발전시켜보자는 민간운동이 그것이다. 디젤 등 화석연료를 이용하는 발전기와 자동차 농기계 등을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고 정보기술(IT)기반의 친환경 지능형 전력운용시스템인 스마트그리드 기술을 적용해 녹색마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0kw급 발전기 2기(예비용 1기 별도)와 20kw급 태양광 발전기 1대로 생산되는 전력을 대형 배터리에 저장하고 이를 EMS라는 중앙 관리ㆍ통제장치를 통해 가정에 배분하는 개념이다. 자동차와 농기계의 동력도 물론 전기다.
한 지역 기업의 주도로 시작된 이 사업에는 관련 기업과 연구소는 물론 대학교수 건축가 회사원 언론인 외교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가파리 이장을 비롯한 마을 지도자들 역시 사업 공감대 확산과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지난해 7월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열린 G8 확대정상회의 기후변화 세션에서 스마트그리드 선도국가로 선정됐다. 일찍이 이 기술의 국가단위 발전로드맵을 세계 최초로 수립하고 미국과 스마트그리드 기술 공동개발 및 공유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걸음을 빨리 한 덕분이다. 정부는 이 사업을 위해 제주에 실증연구 단지를 선정하고 올해 말까지 상세 설계를 완료한 뒤 내년부터 실증 결과물을 시범도시부터 보급한다는 일정을 마련했다.
가파도의 '탄소제로 사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스마트그리드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마이크로그리드라고 불리지만 정부 프로젝트와는 별개다. 그래서 더욱 뜻 깊은 반면 일은 힘들고 벅차다. 대단위 지능형 전력인프라 선도사례를 만들어야 할 정부 입장에서 보면 가파도 사업은 일단 규모가 너무 작고 혁신성과 수익성도 불확실하다. 거주인구 등을 감안하면 정치적으로 수지맞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정부의 지원 손길은 아직 멀다.
제주올레도 동참, 정부지원 필요
그러나 '가파도 미래발전위'를 꾸민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거대담론에 머물러 있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델로 가파도 만한 곳이 없다는 확신에 차 있다. 가파도에서 소규모 고효율 에너지 공급시스템이 성공하면 비슷한 규모의 국내 섬은 물론 세계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섬과 지역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에 따른 고용, 기술, 수출 효과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것이며 스마트그리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확산하는 선도프로그램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법하다. 올 가을 서울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와 2012년 제주도서 열리는 세계환경총회에 내세울 상품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엊그제 '제주올레'는 가파도에 '10-1 코스'를 열었다.'탄소 없는 생태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정부와 지자체 관계자들이 봄볕에 그을린 그 길을 꼭 걸어보길 권한다.
이유식 논설의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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