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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전쟁'후 벌써 42년이… "차별말라" 절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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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전쟁'후 벌써 42년이… "차별말라" 절규 사라졌을까

입력
2010.03.2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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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 총기 살해, 88시간의 인질극, 그 와중에 연 기자회견….'

1960년대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던 김희로 사건의 주인공 재일동포 2세 권희로씨가 26일 오전 6시 50분께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전립선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권씨 석방 운동을 주도했던 부산 자비사 삼중 스님은 이날 "권씨가 미워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었다"며 "생전 그가 가장 존경했던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 생을 마감해 더욱 가슴이 아린다"고 말했다.

권씨의 질곡으로 점철된 삶은 28년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에서 소위 조센진으로 태어나면서 시작됐다. 4세 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의붓아버지의 김씨 성을 얻은 그는 유년 시절을 가난과 차별 속에 보내야 했다. 소학교 5학년 때 퇴학당한 그는 이후 연탄 회사 직원, 부두 노동자 등을 전전했다. 절도 등 형사 사건에도 수차례 연루됐다.

인생의 변곡점은 그의 나이 41세에 찾아왔다. 권씨는 1968년 2월 20일 시미즈시의 한 술집에서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은 야쿠자 두목과 부하 한 명을 엽총으로 사살했다.

이어 그는 인근 하이바라(榛原)군의 한 여관으로 달아나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다. 그는 인질극 도중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해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국내 종교인 등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99년 9월 7일 가석방됐다. 31년 6개월의 옥살이를 끝낸 것이다.

권씨 사건은 일본과 한국에서 '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석방 후 친아버지 성을 따라 권희로가 된 그는 국내 영주 귀국을 앞두고 "나의 전쟁은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일어났을 사건이었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영주 귀국한 후에도 사기와 치정 등 불미스런 사건에 얽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000년 후원자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 생활을 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그의 부인이 6,000만원 상당을 챙겨 달아나기도 했다.

권씨는 이달 초 일본 언론에 "죽기 전 어머니 묘에 절을 올리고 싶다. 방일 탄원서를 내겠다"고 했으나 모정을 향한 목마름을 끝내 풀지 못했다.

그는 삼중 스님에게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뿌려 주고,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그는 이렇게 갔지만 '김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사회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빈소 봉생병원 장례식장, 발인 28일 오전 8시 30분. (051)531_7100

부산= 강성명 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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