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역할은 술에 취한 주인의 술 창고 열쇠지기와 같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조지 쿠퍼는 저서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 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성장'과 '물가' 사이에서 이성적 판단을 하지 않고,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 창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통화정책을 완화하라고 압박을 가한다는 뜻. 중앙은행이 정부에 맞서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민스키의>
이 때문에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왔다. 우리나라도 1997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중앙은행과 통화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성을 법제화했으나, 아직까지도 금통위원들이 소신껏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대통령(5년)보다 짧은 임기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임기를 미국처럼 길게 늘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정권보다는 충분히 길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명권자의 임기보다 통화정책위원의 임기가 길어야 정책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통화결정기구 이사나 위원의 임기는 미국이 14년, 유럽중앙은행(ECB)이 8년, 일본이 5년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47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중앙은행 지배구조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처럼 통화정책위원의 임기가 3~4년인 곳은 6%에 불과했다. 81%가 5~8년까지 임기를 보장해주고 있다.
임기는 짧은데 지나치게 처우가 좋다 보니 오히려 소신 있는 정책 결정에 방해가 되므로 '명예직'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3억원 넘는 연봉을 4년 동안 받는데다 익명성 덕분에 책임은 질 필요가 없다 보니 '금통위원이 되려고 늘어선 줄이 한은 정문 밖에 100m나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며 "소신껏 일하는 사람만 지원하도록 임기는 늘려주되 연봉 등 처우는 지금보다 확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성 강화 차원에서 금통위원의 익명성도 차제에 '실명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끝나면 금리결정 발표문과 함께, 어떤 의원이 찬성하고 반대했는지가 즉각 공개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개별 금통위원의 찬반결과는 공개되지 않는다.
심지어 약 한달 반 뒤 공개되는 금통위 의사록에서조차 '일부 위원은 ~라고 말했다'식으로 소개될 뿐, 발언한 개별 금통위원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장에선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임기연장, 책임성 강화와 함께 금통위원 임명절차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미국은 이사 임명시 상원 동의를 거치고, 영국은 재무장관이 정책위원을 임명하지만 하원의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
일본도 내각이 임명하지만 양원 동의를 얻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추천제 자체가 무력화된 상태에서 국민적 검증이나 동의절차 없이 그냥 청와대가 임명한다. 구조적으로 임명권자에 대해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덕훈 전 금통위원은 "애초 추천제를 도입한 취지가 능력 있는 전문가를 고르자는 것이었는데, 현재 그렇게 운영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차라리 대통령이 바로 임명하되 장차, 해외처럼 국회를 거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좋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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