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너무 끓인 잡탕찌개 같다. 해석한 역사에 왜곡과 편견이 녹아 들어 사료가 전하려던 원래 맛을 찾기 어려운 건 물론이고, 애초의 역사기록에도 양념이 가득하다. 한동안 입이 당기던 진한 양념의 음식 대신 천연양념조차 최소로 줄인 음식에 끌리듯, 화장을 지운 역사의 모습이 궁금하면 칠을 벗겨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또 다른 편견의 출발점이 되더라도, 해석된 역사가 채우지 못하는 호기심은 실마리에라도 기댄 논리적 상상을 통해서나 달랠 수 있다. 악명 높은 '임나(任那)일본부설'도 뜯어보면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의 골격은 '진구(神功) 황후 때 삼한과 가야를 평정해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삼한을 통제했다'는 <대일본사> (1720년)에서 이미 갖춰졌고,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 (1949년)에서 완성됐다. 1960년대 남북한 학계의 반론이 잇따랐고, 일본 학계도 가야지역에 집단 거주한 왜인을 통제하기 위한 출장기관이라는 등의 주장을 쏟아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전통적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에서도 크게 세력이 위축됐고, 군사적 성격을 배제하는 대신 외교ㆍ교역기관으로 보는 주장 등이 두드러졌다. 임나흥망사> 대일본사>
■ '임나'의 일본식 독음인'미마나'의 소리 값은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뜻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일본에서는 '님(主)의 나라'라는 해석이 많고, 국내에서도 이를 확장해 '종주국''본국' '종가(宗家)'로 보기도 한다. 일본 기록은 '가야'나 '가라' 대신 일관되게 '미마나'에 매달린다. 지금은 제대로 모르지만 무언가 특별한 뜻을 가진 말임에 틀림없다. 임나일본부의 다른 표현인 '우치노미야케'(內官家)가 일본 고대왕조인 야마토 정권의 직할 영지를 뜻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상상력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 바다 건너에 직할 영지를 두었다는 뻔한 주장이야 그렇더라도 그런 서술에 담으려던 속뜻을 더듬기에 충분하다. 예도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용이 바다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 윌리엄 1세로 등극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유지했고, 죽어서 고향 땅에 묻혔다. 잉글랜드 궁정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였고, 잉글랜드 왕실이 오랫동안 노르망디를 지배해 프랑스와 갈등을 지속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야연맹 종주국이던 금관가야가 홀연히 사라진 후 바다 건너에 태어난 야마토 정권의 '본국'에 대한 집착과 다름 없다. 의문이 풀리고, 가야를 다시 보게 되는 덤도 얻는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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