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읽어내려가던 김양 국가보훈처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국권을 회복하거든 고국에 뼈를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마지막 유언조차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이자 2008년 국가보훈처장 취임 직후부터 과거 누구보다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였다. 순국 100년, 나라를 되찾은 지 65년이 지난 지금, 안 의사는 어느 땅 아래에서 잠들어 있을까.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旅順)감옥 내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형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때는 10시를 지난 4분이며 同(동) 15분에 監獄醫(감옥의)는 死相(사상)을 檢査(검사)하고 絶命(절명)하였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이에 드디어 執行(집행)을 끝내고 一同(일동)이 退場(퇴장)하였다.
10時(시) 20分(분) 安(안)의 死體(사체)는 특히 監獄暑(감옥서)에서 造製(조제)한 寢棺(침관)에 넣어 白布(백포)를 덮어 敎誨堂(교회당)으로 運柩(운구)되었는데, 이윽고 그 共犯者(공범자)인 禹德淳(우덕순), 曹道先(조도선), 劉東夏(유동하) 3명을 끌어내어 특히 禮拜(예배)를 하게 하고, 오후 1시 監獄署(감옥서)의 墓地(묘지)에 埋葬(매장)하였다." 그러나 안 의사를 매장했다는 '감옥서의 묘지'가 어디인지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일본이 구체적인 유해 소재지에 대해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해는 당시 일반적인 사형수의 경우와 달리 즉시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았다. 이는 뤼순감옥의 묘지라는 게 당시만 해도 제대로 조성돼 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로 감옥 뒷산, 인근 야산 능선 등이 거론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열쇠를 쥐고 있을 일본에 대해 정부가 외교전에 뛰어든 것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이후였다. 당시 외교부는 일본 정부에 안 의사 유해 매장지와 관련한 자료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불가'였다. 2008년 3월 재차 일본 정부에 자료를 요구했지만 '문서정리 차원에서 찾아봐도 없더라'는 무성의한 답변이 전부였다.
92년 중국과의 수교와 일부 관련 자료의 발굴 등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선 직접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현지 조사 노력도 진행됐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차례 남북실무접촉과 남북공동조사단의 뤼순 현지 조사가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2008년 3~4월에도 뤼순감옥 북서쪽 야산을 유해매장 추정지로 확정하고 남측 단독으로 29일간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동물 뼛조각만 발견됐을 뿐 안 의사의 유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뤼순감옥 주변 어딘가에 아직 안 의사가 묻혀 있거나, 일본이 이미 다른 곳으로 유해를 옮겼을 수도 있다. 묻혀 있던 유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8년 발굴 당시 유해 매장 추정지의 땅이 상당 부분 깎여 나간 뒤 20년대 그릇 조각 등 쓰레기들로 묻혀 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8년 유해발굴단에 참여했던 박선주 충북대 교수는 "뤼순감옥이 10~20년대에 걸쳐 수 차례 벽돌을 이용해 증축이 이뤄졌는데, 인근의 흙을 파서 썼을 가능성도 있다"며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중요한 건 어떤 경우에도 일본이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중국 땅을 계속 발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다시 한 번 외교적 노력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김양 처장은 "철저한 기록문화를 갖고 있는 일본의 특성을 미뤄 보면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결정적인 사진과 자료가 있다고 확신한다"며 "일본이 이제는 진정성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처장은 안 의사 유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일왕의 방한을 반대한다는 입장도 거듭 확인했다.
진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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