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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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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봉은사

입력
2010.03.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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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안개는 옛 나루터에 비끼고/ 지는 해가 먼 산으로 내려가네/ 조각배로 떠나가는 저물녘/ 절이 아득히 노을 사이에 보이네.' 조선 중기의 학자 정렴(鄭磏)이 1547년 나룻배를 타고 봉은사(奉恩寺)에 놀러 가면서 지은 작품이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자 자욱한 저녁 안개 사이로 아스라히 자태를 드러내는 봉은사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봉은사는 한강변에 위치해 수사(水寺) 또는 호사(湖寺)로도 불렸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정비된 한강 둔치에는 넓은 백사장 주변으로 다디 단 살구꽃 향기와 흐드러진 버들가지가 운치를 더했었다.

■ 봉은사 자리에는 원래 794년 세워진 견성사(見性寺)가 있었다. 1498년 연산군 때 정현왕후가 남편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 옆의 견성사 터에 절을 짓게 하고 봉은사라 칭했다. 지금 자리에서 서남쪽으로 1㎞ 지점이다. 1562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한양 도심과 가까워 왕실 사찰의 기능을 하는 한편,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했다. 봉은사는 한시(漢詩)의 산실이기도 했다. 성종이 젊은 학자들을 위해 용산 한강변 언덕에 마련해준 독서당(讀書堂)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송인(宋寅) 등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 최근 입적한 법정 스님은 1960년대 말부터 75년까지 봉은사 다래헌(茶來軒)에 기거했다.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75년 인혁당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독재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걸 느끼고는,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삶을 상징하는 수필 <무소유(無所有> 도 봉은사 체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기르면서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봉은사는 196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조계종 이권 다툼의 온상이 됐다. 최근의 직영사찰 전환 결정이 종단 내부의 이해 관계 탓인지, '좌파 주지'를 쫓아내려는 여권의 외압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현 주지 명진 스님이 국내 사찰 최초로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봉은사에 새 바람을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외압설의 주인공인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좌파정권의 편향된 교육 탓에 성범죄가 생겨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평소 좌파 타령을 일삼던 인물이다. 공직사회와 문화계, 방송계에 이어 종교계에까지 '조인트'를 까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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