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 건국대 총장은 며칠 전 고희(古稀)를 넘겼다. 사실 오 총장 만큼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도 드물 것이다. 20ㆍ30대엔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냈고, 40세 이후엔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정부 부처 장관을 4차례나 거푸 역임했으며, 5년간 언론사 대표를 맡은 경험도 있다. 대학 총장 역시 아주대 총장에 이어 두번째다. 이쯤 되면 '행정의 달인', '대학 경영의 전문가' 닉네임이 아주 잘 어울린다.
오 총장은 대학이 구조개혁 바람을 타고 너도 나도 연구중심으로 가는 세태를 경계했다. 그는 "연구가 중심이 되려면 일종의 '대학원 대학'의 틀을 갖춰야 하는데, 여기에 부합할 정도로 대학원생 규모를 갖춘 대학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 총장은 "교육의 본질은 가르침"이라며 "학생들을 잘 가르쳐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교육 본연의 목표이자 고등교육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건국대가 최근 수년 사이 경쟁 대학들을 제치고 급성장한 비결에 대해선 "연구역량 강화와 교육 프로그램 내실화, 국제화 등 3가지 덕분"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_연구역량을 어떤 방식으로 높였나요.
"연구역량 강화를 뒷받침하는 프로그램은 사실 획기적이에요. 노벨상을 받은 석학교수 3명이 건국대 연구진과 함께 구축한 3곳의 'KU 글로벌랩'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세계적 연구성과를 향하고 있습니다. KU 글로벌랩은 노벨상 수상 석학들을 데려다가 특강 잠깐하고 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석학들의 연구실을 아예 건국대에다 두고 함께 연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젊고 유능한 교수진들을 500여명이나 새로 임용했어요. 해외 대학에서 석학들과 함께 연구했던 젊은 교수들이 대거 영입되면서 몇 년 후면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겁니다."
건국대엔 핀란드 VTT, 독일 프라운 호퍼 등 세계적 연구소들이 입주해 있다. 차세대 태양전지와 디스플레이 등 새로운 성장동력 분야의 공동 연구에 한창이다. 오 총장은 "몇 년 전만해도 외부 연구비 수주액이 몇 백 억원대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1,000억원을 돌파했다"고 귀띔했다. 외부에서 연구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_연구중심 대학으로의 치우침을 경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나라 대학들이 연구중심으로만 가는 것은 반대해요. 연구중심이 되려면 결국 대학원이 주축이 된 대학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현재 대학원생의 규모가 연구가 중심이 될 정도로 여건을 갖춘 대학은 흔치 않아요.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치는 기관이라고 봐요. 교수가 강의를 잘 하고, 학생 지도를 잘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러려면 교수들이 끊임없이 좋은 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학생들을 배려해야 해요. 틈 날 때마다 교수들에게 '잘 가르치고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민해달라'고 당부하고 있어요. 교수 평가 방식도 논문 등 실적 위주에서 강의 및 학생 지도를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_주요 대학들은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올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제화에 역점을 둬야 할 걸로 보여요.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는 글로벌 지식경쟁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국내 대학들과의 경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건국대는 학생들을 외국에 많이 보내고, 외국 유학생과 교환학생을 많이 받는 전략을 시행하고 있지요. 해외 대학과의 교류협력 프로그램을 대폭 늘리면서 학생들이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확대됐어요. 또 학위과정 유학생과 교환학생 유치도 늘었어요. 국제화 지수가 당연히 크게 향상됐어요."
오 총장은 국제화의 '물증'을 직접 제시했다. "올해 1학기에 858명이 해외 교류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나가 있어요. 외국인 교환학생도 2008년 486명이었으나, 올 1학기 현재 772명으로 급증했어요. 학위과정에 등록한 학부 유학생도 2008년 546명에서 1학기 현재 1,734명으로 늘었습니다. 2학기엔 유학생 수가 2,000명을 넘어설 겁니다."
_일부 대학을 중심으로 영어 강화를 통한 국제화 움직이 뚜렷합니다.
"세계의 역학 구도가 달라지는 시대적 변화 속에 '국제화= 영어화'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해요. 영어 하려고 필리핀에 가서 영어 배우는 것보다 미래를 내다본다는 측면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더 국제화에 가깝지요. 중국에 많이 진출하고, 중국인 유학생들을 국내 대학으로 유치해 이들과 잘 사귀게 하고, 이들을 잘 가르쳐 친한파(파트너십)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국내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국내 대학 교수들이 가르친 중국 학생들이 10~20년 뒤엔 薩뮌?차세대 지도자가 될 겁니다. 앞으로 미국에 가 영어를 사용할 기회보다 중국에서 중국어 쓸 기회가 훨씬 많을 거에요."
_영어 강의 확대 등을 반대한다는 뜻인지요.
"10년을 내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어 강의는 30%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100% 영어 강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지요."
_대학들이 실용학문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경향이 확연합니다.
"요즘 같은 지식정보화사회에 기초 학문과 실용 학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이 서로 융합하고 결합하면서 사회 변화에 맞춰 사회적 수요에 맞는 학문을 창출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문과 인재를 양성해야 해요. 인문학과 같은 기초 학문들은 국ㆍ공립대를 중심으로 국가가 보다 많은 지원을 하고, 사립대는 사회가 필요로하는 실용 융합학문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하는 구조가 있을 수 있어요."
_전공의 융ㆍ통합이 필요하다는 의미인가요.
"미래 사회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응용하는 자기학습능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할 겁니다. 지금은 융합과 통섭의 시대입니다.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를 공부할 수 있게 해야 새로운 진화를 이뤄낼 수 있어요. 예컨대 경영학도도 기술을 알아야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이공계 출신 공학도도 인문학과 리더십을 공부해야 기업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소위 '퓨전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융합 학문의 시대적 흐름에 가장 맞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고교의 문ㆍ이과 구분"이라고 말했다.
_문ㆍ이과를 왜 구분하면 안 되나요.
"고교 때부터 인문ㆍ자연계열로 나누는 폐해는 적지 않아요. 고등 교육과 학문발전, 인재 육성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요. 문ㆍ이과 구분은 사라져야 해요. 경제학의 경우 문과계열 전공이지만 요즘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수학을 요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지요. 문ㆍ이과 구분이 없는 학문이 바로 경제학인 겁니다. 문화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에요. 문화예술 분야에 컴퓨터가 들어가면서 예술은 차원이 달라지고 있어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작가는 경쟁력이 아예 없어요. 컴퓨터 기술 덕분에 새로운 미술 장르가 열리고 예술가도 기술을 알아야 작품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_대학은 융합 교육을 위해 어떤 시도를 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필요해요. 이공계열은 넓은 교양교육을 바탕으로 기술 분야 외에 리더십을 가르쳐야 해요. 인문사회계열도 기술 트렌드를 알아야 급변하는 환경에 대처할 수 있어요. 교수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편협한 학문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봐요. 대학은 전공분야만 너무 좁게 가르쳐선 안 돼요. 융합학문의 시대에 학과와 학부의 장벽을 대폭 낮춰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고 폭넓은 교육을 해야 합니다."
_건국대의 구조조정 내용이 궁금합니다.
"사실 그동안 차근차근 구조조정을 했고, 이제는 내실을 다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학문단위 구조조정은 내부 구성원들간의 합의를 토대로 추진중이에요. 지난해 1학기부터는 학부와 일반대학원에 기술경영학과를 설치했어요. 기술과 경영을 접목한 MOT(Management Of Technology)교육을 실시하고 있어요. 이 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윌리엄 밀러 스탠퍼드대 교수의 이름을 딴 '밀러 MOT스쿨'을 개원했지요. 여기에 올해엔 MOT MBA학위를 주는 경영전문대학원을 열었습니다. 또 올해 첫 신입생을 뽑은 문화콘텐츠학과는 인문학과 디지털기술을 결합했는데, 경쟁률이 70대 1을 넘을 정도로 인기였어요. 물리학 분야는 최첨단 메모리 소자를 연구하는 양자 소자 전공을 신설했어요."
_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원하는 학생들을 선발했나요.
"지난해 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로 뽑은 학생들의 학과 내 참여도가 높고, 특히 인문학 분야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났어요. 올해 전형엔 'KU전공적합전형'을 신설할 계획이에요. 이 전형은 70명을 뽑는데, 그 가운데 문과대의 모집인원이 65명입니다. 문과대 교수들의 요구로 신설했어요.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선발된 학생들이 관련학과에 대한 학문적 잠재성과 발전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학과 교수들이 입증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앞으로도 입학사정관제로 입학한 학생들이 각 학과 내에서 잠재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면 각 대학이나 학과의 요구에 따라 관련 전형을 새로 만드는 등 적극 반영할 겁니다."
오 총장은 최근 페루 콜롬비아 등 남미를 다녀왔다. 'IT 지식 원조'라는 특별한 시도를 위해서다. 한국국제협력단 한국정보화진흥원 등의 지원으로 이들 나라에 정보통신 인프라를 깔아주는 일이다. "한국의 도움으로 남미에 IT산업이 구축될 경우 우리나라 IT 기업의 비즈니스 기회가 더욱 넓어질 것이고, 이는 결국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문호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겁니다."
인터뷰=김진각 정책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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