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보다 도리어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걸림돌이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성폭력 범죄의 친고죄 조항이 ‘합의 종용’ 수단 등으로 악용돼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전자발찌 소급적용, 성범죄자 신상공개 등 국회에서 성폭력 대책 법안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친고죄 폐지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현행 성폭력 특별법은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를 제외하고는, 14~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로, 성인 대상 성폭력 범죄는 친고죄로 규정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등은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범죄는 5대 강력범죄 중 하나지만 친고죄로 규정돼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며 “국회가 성폭력 친고죄 폐지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친고죄 폐지를 담은 형법 일부 개정안 등이 최영희 민주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성폭행 친고죄 규정은 액면 그대로 보면 피해 여성의 명예와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조항이다. 피해 사실을 들춰내고 싶지 않은 성범죄 특성상 피해자의 선택권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을 빌미로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집요하게 합의를 요구해 2차 피해를 당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게 여성단체와 전문가들 주장이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전화나 문자를 통하거나 집까지 찾아와 피해자를 괴롭힌다”며 “특히 가해자들이 친인척이나 동네 사람 등 아는 사이가 태반이어서 피해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1,338건의 상담결과를 분석한 결과,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1,137건(85%)에 달했다. 또 고소기간(1년)이 지나면 처벌할 수 없고, 수사기관마저도 적극적인 수사보다 합의를 종용하기 일쑤여서 성폭력 사범에 대해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친고죄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장진영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은 “친고죄 규정을 폐지하자는 것은 사회적 분위기상 성폭행 피해를 들춰내고 싶지 않은 여성들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며 “수사나 재판절차에서 피해자 신상 등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와 법무부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7.1% 수준이다. 친고죄 지지자들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처럼 신고를 원하지 않는 상황인 만큼 친고죄 개정에 앞서 사회적 여건을 먼저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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