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 경제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헤치고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일찍 회복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각국의 적극적인 재정 확대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번에는 재정 건전성 문제가 불거져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새로운 재정정책 방향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난 2월 11~12일 이틀간 스위스 베른에서는 ‘제2차 OECD 의회예산 기관장 연례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행정부 대표들이 아니라 재정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각국 의회의 예산기관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여타의 재정 관련 국제회의와는 사뭇 무게감이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이어 국회예산정책처가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우리 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영국 등 15개국과 OECD, 세계은행(World Bank) 등의 국제기구가 모두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어 회의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게다가 이번 회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탄생한 베른에서 개최되어, 각국의 공통 이슈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 만한 해법을 모색해 보자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본 회의에서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재정 운용의 새로운 방향과 의회의 역할에 대해 각국 대표단과 예산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이 심도 있게 이뤄졌다. 그로부터 필자는 국회가 지향해야 할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우리나라는 ‘재정운용의 틀(fiscal framework)’로서 ‘국가 재정운용 계획’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아쉽게도 재정 준칙이 포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인 예산 전문가인 미국 매릴랜드대 알렌 쉬크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국가 재정운용 계획에 ‘재정 준칙(fiscal rules)’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국가부채와 공공부채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
둘째,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예산 총액을 배분하고 그 한도 내에서 상임위원회가 세부항목별 예산을 심의하는 Top-Down방식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OECD 컨설턴트인 요아킴 베너 교수는 “예산에 대한 의회의 권한 증가는 예산 증액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상임위원회에서의 예산 증액이 일상화 되어 있어 이에 대한 제어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예산 효과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강화해야 한다. 문제 제기와 논의가 객관적 분석자료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치적 논쟁을 넘어 합리적인 방안 모색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시사점들은 모두 의회의 전문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OECD 국가들은 의회 예산전문조직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회예산정책처(NABO)에 대해 미국 의회예산처(CBO) 처장 대리직을 수행한 바 있는 배리 앤더슨 OECD 예산국장은 “NABO의 발전상은 놀라운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이는 회의 참가국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터키 의회는 “NABO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한국의 ‘국회예산정책처법’을 번역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적인 ‘의회예산처’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의회가 예산 조정에 대한 권한을 상실한다면, 국민의 자유도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전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의 말을 되새기며, 국회의 예산지원 조직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것이다.
신해룡 국회예산정책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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