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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봄바람 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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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봄바람 불 때

입력
2010.03.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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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스한 은현리, 키 작은 보리밭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입니다. 저 바람 속에 제 이마를 짚어주고 가는 따뜻한 손이 있습니다. 그 손으로 하여 봄바람이 불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 수 없는, 설렘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것이 울컥울컥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첫사랑이란 것을 이때쯤 시작했나 봅니다. 나는 보리밭 위로 부는 바람을 좋아하던 소년이었습니다. 바람에 이리저리 누웠다 일어서는 보리밭의 푸른 일렁임에 가슴 마구 뛰던 소년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가슴 두근거리며 좋아하던 첫 감정, 그건 보리밭으로 불던 봄바람 같은 것이었지요.

제 마음에 어떤 보리밭이 있어 바람은 그렇게 어지럽게 흔들어 놓고 갔던 것일까요. 누굴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 누굴 위해 눈물을 흘린 것, 그건 아마 봄바람 탓이었을 것입니다. 제 봄바람을 다스릴 방법은 제가 잘 압니다. 은현리 청솔당(聽蟀堂), 제 작은 방들을 손님을 맞이하듯 청소해야겠습니다.

겨우내 이리저리 쌓아놓은 책들을 차곡차곡 모서리 가지런히 정리해야겠습니다. 쓰다 만 편지는 찢어 태워버리고 만년필에 새 잉크를 가득 채워 넣어야겠습니다. 묵은 커피와 차를 버리고 향기 좋은 것들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봄입니다. 봄바람이 붑니다. 그대, 저기쯤 그대가 좋아하는 산수유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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