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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20세기 분서갱유, 왜 더 악랄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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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20세기 분서갱유, 왜 더 악랄해졌나

입력
2010.03.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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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크누스 지음ㆍ강창래 옮김/알마 발행ㆍ512쪽ㆍ2만6,000원독일 나치·세르비아·중국 마오주의자 등 민족·인종·공산주의 앞세워 책 학살 자행"민주적 휴머니즘으로 인류 유산 지켜야"

권력과 책이 불화를 일으킨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 왕국의 아멘호테프 4세는 즉위하자마자 테베의 사제들이 지녔던 모든 저작을 파괴하도록 명령한 뒤 수도를 테베에서 아마나르로 옮겼다. 그러나 그가 죽자 테베의 사제들은 왕궁에 있던 두루마리를 모두 불태움으로써 앙갚음을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덕치를 강조하는 유가들을 절멸시키려했던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잘 알려져 있다.

이성의 발달도 이같은 반문명 행위를 중단시키는 데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책의 파괴 현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형화됐으며 지독해졌다. 하와이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인 레베카 크누스는 특히 20세기를 주목한다. 그는 이 시기에 이뤄진 책과 도서관의 파괴 현상을 '책의 학살(libricide)'이라고 명명한다. 도서관 혹은 장서를 뜻하는 'library'와 학살을 뜻하는 'homicide'를 합쳐 아예 한 단어로 만든 듯하다.

크누스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이전에 이뤄진 책과 도서관의 파괴가 힘을 과시하려는 지배자들의 단순한 권력욕에 기인했다면, 20세기의 책의 학살은 정부의 승인 아래 민족주의, 인종주의, 공산주의 같은 특정한 이념을 바탕으로 장ㆍ단기적 목표를 향해 계획적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왜 이런 전면적인 문명파괴사태가 20세기에 발생했는가를 규명하는 열쇠는 이념이다. 저자는 책의 학살이 이뤄진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다섯 가지의 사례를 세밀하게 살핀다. 나치가 유럽에서 저지른 행위,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저지른 행위, 마오주의자들이 중국과 티베트에서 저지른 행위,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에서 저지른 행위가 분석 대상이다. 그들은 민족주의의 운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혹은 어떤 인종이 '핏줄'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혹은 어떤 계급이 혁명을 사보타주한다는 이유로, 책과 도서관을 무자비하게 파멸시켰다.

저자가 증언하는 학살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나치의 경우 1930년대부터 유대인들의 출판을 금지시키고 책들을 태웠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는 아예 방화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수천만, 수만권의 책을 불태웠다. 폴란드 유대인들의 책은 70%가 파괴됐는데, 그나마 살아남은 책들은 독일 학자들이 연구하기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나치가 오래 전부터 독일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체코에서의 파괴 행위도 계획적이었다. 200만권가량을 파괴했는데 이는 당시 체코의 전 도서관과 공문서 보관소에 있던 책의 절반에 해당한다.

학살이 특정 집단이나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위축시키기 위해 이뤄진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예컨대 1950년대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은 티베트인에게 그들이 신성시하는 불경의 필사본을 불태우거나 갈갈이 찢게 했고 거름에 섞도록 했으며 이를 밟고 지나가도록 강요했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줌으로써 반항 의지를 꺾겠다는 의도였다.

저자는 이렇게 학살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참담한 반문명 행위가 왜 20세기에 일어났는가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의 불안정과 불경기를 틈타 고통을 줄여주겠다는 극단주의적 이념을 내세운 지도자의 등장이 이같은 비극을 초래했다고 분석한 뒤 "인류의 행복과 이상을 지향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념들이 도리어 잔인한 결말을 가져다 주었다"고 탄식한다.

이념적 극단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20세기의 비극을 목도한 저자가 이를 막기 위해 제시하는 대안도 역설적으로 이념이다. 그는 관용에 기반해 파괴적인 충동을 억제하는 '민주적 휴머니즘'의 공유야말로 문명의 정수이자 인류의 공동 유산인 책과 도서관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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