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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9>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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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9>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

입력
2010.03.1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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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쉰이 넘도록 들으며 살았습니다. 팔순을 훨씬 넘긴 분이 며느리와 손녀들 보는 앞에서 아들 먹는 것 입는 것까지 간섭을 하셨지요. 듣다 못한 며느리가 이제 그만하시라고 맞대응을 하면서 고부 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팔순의 시어머니와 초등학교 교사 경력 27년의 며느리가 벌이는 설전(舌戰)이 집안 싸움의 주류를 이루는데 결과는 어머니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언어 공격은 본인은 화를 내지 않으면서 상대방 감정을 긁는 고단수 화술입니다. 쩡쩡한 음성에 실리는 말의 에너지가 고저 장단 강약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며느리의 화를 돋우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울면서 주저앉는데 정작 본인은 말다툼을 즐기는 분위기지요. 말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적당한 침묵과 휴지부 사이에 폭포수처럼 쏘아대는 사자후는 상대방을 일시에 묵사발로 만듭니다. 쉰이 다 된 며느리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 때쯤 아들의 지원 사격이 시작되지요.

"이제 좀 그만하란 말이오! 왜 아침부터 먹는 것 가지고 야단이오. 밥이 목구녕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녕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에이!"그러면서 밥상을 엎어 버리고 일어서는데 이게 또 다른 화약고를 건드리는 꼴이 됩니다. "그래, 잘하는 짓이다. 어미 앞에서 밥상을 엎고…, 이 집안은 자손 대대로 밥상 엎고 집 나가는 게 주특기냐, 너 이리 좀 앉아 봐라. 이야기 좀 하자."

그러면서 바싹 다가앉으시는 것입니다.10분만 하겠다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네 시간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두 번 다시 안 하겠다는 말을 수천 번 수만 번 들으면서 어머니와 같이 살아 온 셈이지요.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는 같은 내용에 같은 어조인데, 수천 번 되풀이되면서도 늘 새로운 현장감을 제공합니다. "그래, 너의 아버지가 초량 명태 고방에서…"로 시작되기 일쑤인 어머니의 이야기는 아버지 씹기에서 씹으면서 은근히 그리워하기로 이어집니다. 2부는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로 발전하지요. 이때쯤 되면 저는 울화가 슬그머니 치밀어 올라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 하고 정말 미치겠네!" 고함을 지르면서 판 깨기를 시도하는데, 어머니는 "내가 언제 이 이야기 했노" 정색을 하고 시치미를 떼십니다.

"사람이 기억력도 그리 없소. 정말 안 했단 말이오!"라고 밀어 붙이면 "예라, 이 호로자석아! 애비 닮아가지고 어디다 누깔 치 뜨고 지랄이고 지랄이!" 대갈일성으로 맞받으십니다. '호로자식'은 '아비 없는 후레자식'의 사투린데, 이 말이 나올 때쯤이면 딸자식의 교육에 문제가 되는 일이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구사하시는 상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싱싱한 경상도 토박이 언어의 미학일 수도 있지만, 의미론적으로 지독한 욕설이 되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돌아가실 때까지 듣기 싫어하셨습니다. 조상 제사 지낼 때 하루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한 번도 마음 편하게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와장창 밥상을 엎고 발걸음을 대문 밖으로 향하시는 아버지를 급히 뒤쫓아 나가면 "너의 엄마 말 잘 들어라" 한 마디를 툭 던지시고는 살같이 사라지셨지요.

정작 본인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못하시면서 저보고는 말 잘 들으라는 아버지의 말씀만큼 모순된 말은 없었지요.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에게 말을 하시려 했고 아버지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집요하게 말을 걸려 하시고 나는 참아내지 못한 것이지요. 며느리가 참아내지 못하고 중학교 다니는 손녀딸이 견뎌 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생후 14개월 된 막내에게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에게까지 전하고 싶은 어머니의 말씀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엉뚱한 꾀를 내어 녹음기를 사 드렸습니다. "나한테 털어놓기 전에 여기다 대고 말을 하소"그날부터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말동무가 생겼습니다. "아, 아, 내 말 들리나? 잘 들리나? 예예, 제가 황두기 올씨다. 헤헤, 그라믄 마 녹음합니다…"로 시작된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가 테이프로 열 대 여섯 개 쯤 되었을 때, 저는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녹음된 테이프로 들으면서 잔소리로 들리던 어머니의 말이 새로운 느낌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작가의 관념적 덧칠이 없는 날것의 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문맹자였기 때문에 현란한 수식도 설명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구어체였기에 배우에게 연기를 시킨다면 군더더기 없이 살아 있는 희곡언어였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말은 특유의 리듬이 있었고, 간간이 한숨과 울음이 적절?효과음으로 개입하였고, 놀랍게도 음울한 노랫가락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억센 경상도 할머니의 말은 그 자체 리듬과 장단과 박자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국어였습니다.

그 후 저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더는 울화가 치밀지 않았습니다. 저 이야기를 엮으면 소설이 되고 역사가 된다. 언젠가 내가 써야 할 살아 있는 텍스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이야기 보따리에 이르기까지, 그 풍성한 말의 보물창고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대표희곡 <오구-죽음의 형식> 1장.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 편은 그대로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훔쳐 왔습니다. 또 다른 저의 희곡 <어머니> 는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를 그대로 풀어 낸 것입니다. <오구-죽음의 형식> 은 1989년에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22년 째, <어머니> 는 1996년 초연 이후 15년 째 공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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