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영국 런던의 사우스런던 갤러리. 한 여성이 계단을 오르더니 전시장을 가득 메운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향해 자신이 만든 금속 조각을 힘껏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국 작가 마이클 랜디(47)는 "착지가 잘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예술 쓰레기통'(Art Bin)이라는 제목을 단 랜디의 개인전은 제목처럼 전시장 전체를 거대한 미술작품 쓰레기통으로 만든 것이다. 가로 8m, 세로 16m, 높이 5m의 구조물에는 400여명의 작가가 갖다 버린 작품이 뒤엉켜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품값이 비싼 작가로 꼽히는 데미언 허스트의 해골 그림을 비롯해 줄리언 오피, 트레이시 에민, 질리언 웨어링, 게리 흄 등 국제적 명성을 지닌 영국 작가들의 작품이 그야말로 쓰레기가 된 것이다. 전시가 끝나면 이 예술 쓰레기들은 똑같이 재활용장으로 간다. 유명 작가의 것이나 무명 작가의 것이나 차이가 없다. 돈으로 예술의 가치를 매기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읽힌다.
yBa의 센세이션, 그 이후
마이클 랜디는 영국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이동시킨 젊은 미술가들을 가리키는'yBa'(young British artists)의 일원이다. 1988년 데미언 허스트 등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학생 15명이 헌 창고에서 연 '프리즈'전을 통해 탄생한 yBa는 유명 컬렉터 찰스 사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1997년 로열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전을 통해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미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랜디는 "젊을 때는 작가들이 영향력이 없었기에 함께 프로모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됐지만 이제는 방향이 각기 달라졌다"며 "스스로를 계속 재창조하는 데 있어 yBa라는 이름이 때로는 발목을 잡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yBa가 젊은 영국 작가들의 폭발적 성장을 이끈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현대미술을 분석한 책 <창조의 제국> 의 저자인 독립 큐레이터 임근혜씨는 "yBa가 예술을 지나치게 상업화했다는 비판도 있다"며 "처음에는 충격적인 소재의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를 주목했지만 차츰 진지한 주제로 접근하는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창조의>
문화적 다양성의 산실, 이스트엔드
yBa와 더불어 영국 현대미술의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런던 이스트엔드다. 이스트엔드는 공장, 창고 등이 많은 낙후지역으로 이민자나 노동계급의 거주지다. 하지만 1990년대 젊은 작가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창작촌으로 변모했고, 이 지역의 다문화적 특징은 창조성의 또 다른 원천이 됐다.
이스트엔드의 대표적 미술관인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1901년 이민자 계몽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 태생이 그렇다 보니 주류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실험적이고 새로운 작업들이 많이 소개됐다. 1939년에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됐고, 잭슨 폴록의 첫 영국 전시와 영국 팝아트의 시작을 알린 '디스 이즈 투머로우'전도 이곳에서 열렸다.
최근 이스트엔드의 화두는 올림픽이다. 인접한 스트래트포드 지역에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화이트채플 갤러리 역시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거쳐 지난해 새롭게 오픈했다. 갤러리 홍보 담당자는 "런던올림픽이 문화올림픽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스트엔드 지역 전체가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이트모던 미술관 역시 올림픽 이전에 분관을 완공할 예정이어서 런던올림픽은 영국 미술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중과 호흡하는 미술
영국에서는 미술이 늘 대중 곁에 있다. 최근까지 미술계의 권위있는 상인 터너상 시상식이 공중파 TV를 통해 중계됐고,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전철역에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런던 중심부인 트라팔가 광장의 좌대에는 역사적 인물의 동상과 나란히 마크 퀸, 레이첼 화이트리드, 안토니 곰리 등 현대 미술작가들의 작품이 올라오고 있다. 테이트 미술관의 경우 큐레이터보다 많은 교육프로그램 담당자를 둘 만큼 공공성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의 커미셔너를 맡고 있는 영국문화원은 1938년부터 수집한 영국 현대 작가들의 컬렉션 8,500점으로 해외와 국내를 순회하는 무료 전시를 연다. 영국문화원의 컬렉션 매니저인 다이애나 애클스는 "터너상과 달리 신진 아티스트의 발굴과 양성이 목적이기 때문에 젊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데, 그 중 많은 이들이 유명 작가가 된다"고 말했다.
영국에는 한국 작가들도 다수 포진해 있다. 정연두, 김기라, 전준호씨 등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이 런던에서 공부했다. 2008년 개관 이래 매년 재영작가전을 열고 있는 런던 한국문화원 측은 "현대미술에서 영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유학생은 물론 영국을 근킹?활동하는 한국 작가들도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런던=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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