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베이트 '중독' 끊고 신약 메이커로 '체질개선'부터
1월 1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강당. 소화제 가나톤의 제네릭(복제약)를 개발한 30여개 제약 업체에서 불려 나온 임ㆍ직원들이 보건 당국이 제시한 확인서에 서명했다. 각 업체가 앞으로 제네릭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의료인에게 리베이트를 주다 적발되면 어떤 조치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다.
불법이 발각되면 의료법이나 약사법에 따라 처벌하면 될 문제에 대해 보건복지가족부가 확인서까지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약 업체와 병원 간에 뿌리 깊은 리베이트 관행 탓이다. 의사가 특정 약을 처방전에 적어 넣지 않으면 그 약은 팔리지 않는다. 의사가 처방전에 약 성분을 적는 게 아니라 약품 이름을 쓰는 구조여서다. 제약 업체들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신약 연구개발(R&D)에 몰두하기보다는 안정적 이익이 보장된 제네릭을 만들고, 대신 여기서 남는 자금을 리베이트로 뿌리게 될 수밖에 없다.
리베이트로 버텨 온 제약 업계
방법은 다양하다. 신제품 설명회에 참석한 의료인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병원 의국 및 진료과 회식비를 지원해 주는 건 기본이다. 일부 제약 업체는 아예 신용카드를 줘 필요할 때 의사들이 알아서 쓰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또 특정 학회나 병원에서 영향력을 지닌 의사를 관리하기 위해 자사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금품을 제공한다. 병원 홈페이지 제작ㆍ유지 비용를 제약 업체가 부담하기도 한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의약품의 리베이트 관행이 오랜 기간 유지돼 온 건 소비 구조가 독특해서다. 일반 상품은 소비자에게 구매 선택권이 있는 반면, 의약품은 대부분의 선택권이 소비자가 아니라 환자를 진료한 뒤 처방하는 의사에게 있다. 제약 업체들이 의료인에게 로비하는 이유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제약 업체의 평균 리베이트 비용은 매출액의 15~20%로 추정된다. 국내 제약 산업 규모가 17조원(2008년 기준)임을 감안하면 3조원 정도다. 리베이트는 약값 상승을 초래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유발한다. 제약 산업 경쟁력도 갉아먹는다. 통상 신약 개발에는 10년간 연 1,000억원씩의 투자비가 들어가는 데다 투자가 곧바로 신약 개발 성공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돈을 리베이트로 쓰면 효과가 확실하다. 대신 특허가 만료되는 신약을 복제하는 저렴한 생산 방식을 택하게 된다.
R&D로 물꼬 튼다는 정부
정부가 의약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리베이트 근절이다. 낙후성에서 벗어나 세계로 진출하려면 신약 개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첫 단추가 리베이트를 없애고 R&D를 육성하는 것이다.
물론 전체 제약 업체의 48%가 매출액 100억원 미만인 점을 고려하면 영세 기업의 생존을 위한 리베이트가 사라지기 어렵다. 하지만 동아제약 녹십자 LG생명과학 셀트리온 등 대형 제약 업체의 글로벌 기업 도약을 위해서는 리베이트 근절과 R&D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난달 정부가 의약품 거래 및 약가 제도 투명화 방안을 내놓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병원이나 약국이 제약 업체로부터 정부 고시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약품을 구입하면 낙폭의 70%를 해당 기관에 인센티브로 줌으로써 리베이트를 없애는 촉매제로 쓰겠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약값 하락에 따른 제약 업체의 수익성 악화를 막기 위해 R&D 지출이 많은 기업에게는 약값 하락폭의 최대 60%를 보전해 주기로 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의료법과 약사법 개정안을 손질해 리베이트를 받는 의료인도 처벌(쌍벌죄)하기로 했다. 임종규 복지부 의약품가격및유통선진화 태스크포스(TF) 국장은 "리베이트가 없어진다고 해서 기업들이 곧바로 신약 개발에 뛰어들 순 없지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앞으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한 세계적 기업들이 나올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기수 기자
■일본 극복 사례
리베이트 관행은 일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건강보험 격인 국민개보험제도가 1961년 도입되면서 제약 업체와 의료 기관 간에 뒷거래가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보험 도입과 함께 국민들의 의료 수요가 크게 늘면서 병원에 자사 제품을 납품하기 위한 제약 업체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제약 업체들은 리베이트로 TV나 냉장고, 해외여행 상품권을 제공했다. 리베이트는 결국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과잉 투여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일부 병원의 경우 영업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관행은 없어지지 않았다. 리베이트 적발에 대한 처벌보다는 리베이트 제공으로 인한 수익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일 후생성은 70년 현물 제공을 통한 리베이트가 적발된 의약품을 보험 적용에서 제외키로 했고 실제로 73년 위반 행위가 발각된 3개 의약품을 보험에서 배제하자 리베이트 관행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신 가격을 깎아 주는 방식의 리베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예컨대 아스피린 100통을 구입하면 대금은 95통만큼만 지불하는 형태로 거래해 병원에 수익을 더 얹어 주는 방식이다.
독버섯은 계속 자라나 의사들의 사치 생활과 의약품 과다 처방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보험 제도가 본래 의도와 달리 오히려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비판까지 나오자 일본제약협회는 76년 의약품 판촉 행위 윤리규정을 제정했다. 80년에는 후생성이 보험약값 인하 정책을 도입했다. 가장 결정적 사건은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의 자살이었다. 엄격한 도덕률로 무장된 것으로 알려진 의사의 리베이트 수수가 적나라하게 언론에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지자 리베이트가 급감했다.
이런 대책은 일본 제약 업계의 발 빠른 성장을 도왔다. 물론 리베이트 근절 과정에서 정부가 약값을 지나치게 내려 업계 경쟁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R&D)이 기대보다 크게 증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리베이트 근절은 국민 건강 증진과 일본 최대 제약 업체 다케다(武田)약품공업(연 매출 10조원) 등 유력 제약 업체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김혜경 의약품정책연구소 정책실장은 "일본의 경우 리베이트 규모가 한국보다 크지 않았지만 꾸준히 고강도 조치를 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체질 개선에 역할을 한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박기수기자
■ "우수 인력·풍부한 경험… 우리도 무한한 가능성"
21세기에는 과학과 산업의 성장을 생명공학과 우주공학이 주도할 것이라고 한다. 의약 산업은 생명공학 산업, 즉 바이오 산업의 핵심이다. 세계 의약품 시장은 첨단 바이오 기술 발달과 함께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른 고부가가치 녹색 성장 산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진국들은 일찍이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과 경제적 파급 효과를 간파하고 국가 차원에서 막대한 투자와 정책적 지원을 하고 있다.
생명체를 이용해 만드는 바이오 의약품은 합성 의약품보다 연구개발(R&D) 비용과 기간이 덜 소요된다. 그리고 바이오 의약품 개발의 성패는 세포 배양, 항체 생산 등과 같은 첨단 기술의 확보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간 세계 의약 산업을 주도해 온 거대 제약 업체들이 바이오 기업을 잇따라 사들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수한 생명공학 기술을 보유한 한국도 이 분야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약품 허가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이유다. 국제 경쟁력이 있는 바이오 의약품의 신속한 제품화 지원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세계 두 번째로 바이오시밀러(바이오 의약품 복제약)에 대한 국제 수준의 허가 기준을 마련했다. 식약청이 국제 수준의 깐깐한 기준을 마련한 건 국내 의약 산업이 수출 산업으로 도약하는 데 필수적이어서다.
올해에는 개량 바이오 의약품인 바이오베터의 허가 기준 제도화도 본격 검토할 계획이다. 아울러 바이오 주권 확보를 위해 바이오 의약품 실용화 지원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생산 시설 구축 및 R&D 자문ㆍ지원 업무를 수행케 하고 의약품의 안전성ㆍ유효성 심사 방법을 변경함으로써 현재 4, 5년 이상 걸리는 제품화 기간을 1년 이상 줄일 예정이다.
그동안 한국 의약 산업은 원료 의약품 수입, 단순 복제 의약품 생산, 가격 경쟁 위주의 마케팅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해 대표적 내수산업으로 인식되었던 게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우수한 R&D 인력과 제품 개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업계의 지속적 R&D와 정부의 선제적 제도화 노력 및 정책적 지원이 뒤따른다면 10년 후에는 선진국 수준의 제품화 역량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 그때가 한국의 바이오 주권 확보, 즉 명실상부한 의약 선진 입국과 의약의 수출 산업화를 달성하는 시점일 것이다.
이정석 식약청 바이오생약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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