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패한 1637년부터 9년 동안 청(淸)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소현세자. 그리고 당시 청 황제였던 홍타이지의 동생으로, 1643년 홍타이지가 죽자 어린 조카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2년 후 명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한 도르곤. 상반된 처지로 같은 시공간에서 부대꼈던 두 역사적 인물은 우연히도 나이(1612년생)가 같았다. 두 동갑내기의 엇갈린 운명이 소설가 김인숙(47)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씨가 장편 역사소설 <소현> (자음과모음 발행)을 발표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 등단한후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대표적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씨가 역사소설을 쓰긴 이번이 처음이다. 소현>
“내가 과연 역사물을 쓸 수 있을까 시험하는 기분으로 청군의 출정을 묘사하는 도입부를 쓴 게 벌써 5년 전”이라는 김씨는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집필 소감을 밝혔다. 등장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특히 그랬다. “현대물의 주인공은 내가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창조한다. 심지어 작품이 안 풀리면 인물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소설 속 인물은 실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존재다. 납득할 수 없는 언행을 했더라도 글을 써나가면서 이해하려 애쓸 수밖에 없다. 마치 그와 연애하듯이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짐작되듯 <소현> 은 명ㆍ청 교체기의 조선과 중국 역사를 재해석하기보다는, 사료의 충실한 고증을 바탕으로 소현세자와 도르곤 등 그 시대 인물들의 심리를 상상하고 묘사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김씨는 소현세자의 노골적 친청(親淸) 행각 혹은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 등 극적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역사적 가설들을 배제한 채, 도르곤이 막 섭정을 시작해 중국을 제패하고 소현의 귀국을 허락하는 1년 반의 시기만 다룬다. 그 시기야말로 일국의 왕세자에서 전쟁 볼모로 전락했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죽음으로 마감한 33년 생애 동안 소현의 내면에 갈마들었을 희망과 절망, 격정과 인내를 압축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소현>
그렇게 김씨가 그린 소현세자는 동갑내기로서 연민과 우정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청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도르곤과, 멸망을 목전에 둔 명을 고집스레 떠받들며 청에 있는 소현을 음해하는 조선 권력층 사이에서 번민하는 자다. 하지만 그는 결코 걱정만 앞서는 햄릿형 인물이 아니다. 자신을 보필하는 좌의정 심기원의 아들 석경이 아비의 끄나풀 노릇을 하자 그에게 자객을 보내는 과단성이 있고, 인조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면서 예견되는 비극적 운명을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김씨는 “소현은 절대적 고독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영웅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입체적 인물 묘사에 더해, 김씨의 독창적이고 유려한 의고체 문장이 독자를 매료한다. 예컨대 도르곤에게서 귀국을 허락받은 소현이 고국의 동생 봉림대군에게 보내는 서신이 그렇다. “그러나 내가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 미천함과 부족함을 논할 자리에 있지 않으니, 나의 유일함을 세상에 떨칠 날이 있으리라. 그러한 날이 오리라. 그때에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니, 나의 한 몸인 형제여. 어디에 있거나, 어느 자리에 있거나, 어질고 강건하거라.”(328쪽)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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