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을 다비한 13일 전남 순천시 송광사. 동트면 북새통이 될 것 같아 캄캄한 새벽에 스님이 안치된 문수전으로 갔다. 영정 앞에 절하고 나오는데 맵싸한 향이 느껴졌다.
절집에서 쓰는 향 치고 냄새가 조금 사나웠다. 상(喪)이 있을 때 쓰는 특별한 향인가 생각했는데 밝은 뒤 보니 무말랭이였다. 문수전 바로 옆, 법정 스님의 은사인 효봉(1888~1966) 스님의 초상을 모신 영각(影閣) 댓돌 위에 곱게 칼질한 무가 마르고 있었다.
50여년 전 통영 미륵산의 토굴에서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법정 스님은 쌀을 씻고 찬거리도 다듬었을 터인데, 무말랭이 냄새가 그 시절 사제간의 청빈한 정겨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흙과 바람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을 법정 스님은 그렇게 스승 곁에서 보냈다.
오전 10시. 스님의 법구가 문수전을 출발했다.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3만여명의 불자와 추모객들로 너른 송광사 경내가 발 디딜 틈 없었다. "석가모니불"을 외는 불자들의 목소리에 108번 타종된 범종의 울림이 묻혔다.
꽃으로 장엄한 상여를 쓰고, 수백 수천의 만장이 뒤따르는 것이 큰스님 다비식의 일반적인 법식이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법구는 서울 길상사를 떠날 때처럼 평소 입던 황토 가사를 덮은 채 대나무 평상 위에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대웅보전 앞에서 법구를 멘 스님들이 무릎을 굽혀 삼배하는 것 외에는 어떤 예식도 치러지지 않았다. 물론 만장도 없었다.
법구는 한 시간 걸려 2㎞ 남짓 떨어진 다비장으로 운구됐다. 다비장은 송광사 초입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가파른 조계산 자락에 있었다.
씨름판 만한 넓이의 터에 여섯 명의 산역꾼이 분주히 숯을 깔고 장작을 쌓았다. 법구가 도착하자 격자로 쌓은 장작 위에 스님을 누이고, 다시 몇 겹 장작을 쌓은 뒤 굵은 통나무를 울처럼 둘렀다. 그게 다였다. 여느 다비식처럼 오방번(五方幡ㆍ다섯 방향의 부처를 상징하는 기)을 설치하지도, 무상계(無常戒)를 염송하지도 않았다.
불을 들이기 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추모객들이 나름의 순서에 따라 헌화했지만, 수의도 짓지 못하게 한 법정 스님의 뜻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절차였다.
자리가 비좁아 수천명의 사람들이 비탈의 나무 틈새에 돌버섯처럼 매달려 다비를 지켜봤다. 기자들 외에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비장을 찾은 이들이 많았는데, 시야를 확보하려 서로 다투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도 몰래 화장해 달라고 했던 스님의 청아한 뜻을 속인들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오전 11시 40분. 대나무에 기름천을 두른 거화봉에 불이 붙었다. 9명의 거화자가 봉을 들었다.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법정 스님과 동문수학한 법흥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법정 스님의 맏상좌 덕조 스님,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 법련사 회주 현호 스님, 송광사 전 주지 현고 스님, 중앙종회 의원 보선 스님이었다. 법정 스님과 연이 깊은 스님, 조계종의 어른 스님들이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화력 높은 불길이 치솟았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던 불자들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들었다. 영정을 들고 있던 앳된 얼굴의 스님도 연신 영정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법정 스님의 수발을 든 손(孫)상좌 혜산 스님이었다. 나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불은 점점 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산수유가 막 꽃대를 내밀기 시작한 조계산의 봄빛이 자욱한 연기 속에 은색으로 반짝였다.
거화 의식이 끝난 뒤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이 "스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다비장을 지키고 있는 사부대중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화중생연(火中生蓮)'을 함께 외치자고 했다. 지금 스님은 떠나시지만, 스님이 남기신 뜻은 불길 속의 연꽃처럼 다시 피어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유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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