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이 깜깜…" 10代 임신 비상구가 없다
"두 달 동안 생리를 안 하길래 임신인줄 알았는데 병원에선 벌써 5개월이니 부모님과 함께 오래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남자친구와 울기만 했어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에요."(고 1여학생)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고 전화를 걸어왔어요. 부모님께는 절대 얘길 못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요. 수술에 필요한 돈도 없는데."(고3 남학생)
서울시립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이하 성문화센터)가 9일 열린 '10대 관점에서 본 낙태불법화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토론회에서 밝힌 2007년부터 4년간의 청소년 성상담 사례 6,000여건 중 일부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10대 청소년들의 임신은 당사자들을 이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이들의 상담내용은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10대 청소년의 임신은 저소득층에서 많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진행된 소득격차로 늘어난 저소득층 10대들은 친밀성에 대한 상호간의 욕구가 커져 연애와 동거생활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10대 청소년들은 임신 이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설사 낙태(임신중절)를 결심하더라도 돈이 없는 데다 보호자의 동의서가 필요해 고민하는 사례가 많았다. 부모에게 눈물로 이실직고하지 않는 한 길이 없는 것이다.
더러는 아이를 낳아 양육하겠다고 결심하는 10대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의 벽이 놓여있다. 바로 학업의 지속여부다. 고3 딸이 임신했다는 한 어머니는 "딸아이의 졸업은 꼭 시켰으면 하는데 학교측은 다른 생각을 한다"며 마땅한 방법을 묻기도 했다. 학교이미지나 면학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자퇴를 종용하는 학교와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부모나 자식 모두 임신을 숨기고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할지, 자퇴나 휴학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많았다.
속수무책이기는 부모나 교사나 마찬가지
사실 고백 이후 실망하고 가슴 아파할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밟혀 그러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그렇다면 자녀의 임신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을까. 19살인 딸이 한 살 어린 남자친구와 성관계로 임신했다는 한 어머니는 남학생 부모에게 연락했지만 "내 아들의 씨인지 어떻게 아느냐, 딸 단속이나 잘하라"는 훈계를 들었다. 어머니 본인도 아이 둘을 가진 처지라 딸에게 낳으라고 말할 수도 없는 터에 상대편 부모가 막무가내로 자기 자식 입장만 옹호하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남녀 학생 양측 부모의 입장이 다르다. 물론 상당수는 남녀 학생 부모가 수술비 등 원만한 합의를 한 경우도 있지만 법적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임신한 10대 청소년을 지도하는 교사라고 별 뚜렷한 대책이 없다. 오히려 이에 대한 교육도, 대응지침도 없는 탓인지 겁부터 먹는 경우도 있다. 자기 반 여학생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한 고교 여교사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학생의 간곡한 요청에 부모나 학교에 알릴 수도 없어 고민하다 결국 "내일 학생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성문화센터를 찾았다. 실제로 학생들은 임신사실을 담임교사보다는 교회 등 종교단체 관계자에게 털어놓아 이들이 성문화센터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늘어나는 임신ㆍ낙태 상담
임신을 하게 된 10대는 낙태를 해도 자유로울 수 없고, 하지 않아도 다른 출구가 없는 현실에서 국가적, 사회적 대책은 이제 걸음마를 떼는 단계다. 10대 청소년의 임신ㆍ출산은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 동안 덮어두고만 있었다. 실제로 성문화센터가 상담한 10대 청소년의 임신·피임·낙태 관련건수는 2007년 108건(전체 성상담의 8.0%), 2008년 160건(8.3%), 2009년 205건(10.5%)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박현이 부장은 "10대들은 신체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서적으로 민감하다 보니 임신중절을 하더라도 후유증과 함께 심리적 고통에 시달린다"며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건강과 경제, 학업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k.co.kr
■ 선진국에선 어떻게/ 출산에서 양육까지 미혼모 안전망 구축
주요 선진국들은 10대 미혼모들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안전망을 구축한 지 오래다. 비슷한 경제수준인 대만만 하더라도 2004년 성평등교육법 제정을 통해 임신한 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다. 임신 출산 낙태를 이유로 차별할 수 없고, 출ㆍ결석과 출산휴가 허가에 대해 융통성을 두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1997년 총체적인 10대 미혼모 대책을 마련했다. 우선 부적절한 임신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성교육을 중ㆍ고교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후속으로 영국정부는 교육비, 양육비, 생활비 등 각종 경제적 지원과 함께 무상으로 거주할 집도 제공하고 있다. 사회적응 및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프로그램도 무료 지원하고 아이와 미혼모의 건강을 살피도록 담당간호사도 지정해준다. 10대 미혼모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미국과 일본도 두 나라 모두 출산에서 양육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일정한 지원금을 10대 미혼모에게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특히 10대 미혼모를 위한 특별학급과 탁아시설을 운영한다. 선진국 역시 10대 미혼모와 낙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지만 이러한 사회안전망 구축으로 극복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4세 미만 미혼모에게 4월부터 양육비로 월 12만여원을 지원하는 계획이 최근에 나왔다. 하지만 이 정도의 지원으로 10대 낙태 등의 문제가 해소될 지는 의문이다. 서정애 인구보건복지협회 조사연구실장은 "우리나라의 10대는 낙태를 하지 않을 경우 적절한 보호를 받을 출구가 없다"며 "이런 실정에서는 모자보건법상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시켜 합법적 낙태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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