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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의 Cine Mania] 영광의 순간 만들어낸 힘겨웠던 과거의 시간

입력
2010.03.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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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몇몇 중견 영화감독들과 저녁과 술을 함께 했다. 이런 저런 말이 오가다 영화감독들의 빈궁한 현실을 빗댄 농담이 나왔다. "비싼 저녁을 먹기 위해 점심도 먹지 않고 왔다." "아침부터 안 먹고 버티다 결국 늦은 점심을 먹었더니 정작 맛있는 음식을 못 먹는다." 살림이 쪼그라든 최근 충무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들이라 씁쓸함을 남겼다. 그러나 주린 배를 부여잡은 과거는 훗날 찾아올 영광의 날을 더 빛나게 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의 김기덕 감독은 한때 서울의 한 대형 놀이공원이 일터였다. 미술을 공부한 그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생계를 이었고, 손님이 없는 틈틈이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그의 고투는 200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으로 결실을 맺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자이언트' 등에 출연하며 1950~60년대를 풍미한 할리우드의 미남배우 록 허드슨(1925~1985)은 한때 트럭운전수였다. 배우가 꿈이었던 그는 쉬는 주말마다 영화사 정문에 서 있었다. 영화관계자들의 눈에 띄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는 수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세기의 별로 거듭났다.

'미녀는 괴로워'와 '국가대표'로 이름을 높인 김용화 감독도 힘겨운 나날을 거쳤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고 트럭을 운전하며 생선을 팔았다. 낮에 장사하고 밤엔 영화 공부를 했다. 물기 어린 웃음이 진한 감동을 전하는 그의 연출은 20대 초반의 간난신고에서 얻어진 것이다.

'아바타'로 흥행의 제왕에 오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젊은 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학을 중퇴한 뒤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적한 길에 트럭을 세워놓고 시나리오를 쓸 때가 인생에서 가장 두려웠다. 동료 운전수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8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의 히로인 캐슬린 비글로는 어둡고 긴 슬럼프의 터널을 통과한 끝에 오스카를 끌어안았다. 2002년 제작비 1억 달러를 들인 대작 'K-19: 위도우 메이커'의 흥행이 전세계에서 고작 6,500만 달러에 그치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바닥을 모르게 가라앉았다. 6년이 지나서야 메가폰을 다시 쥘 기회가 겨우 찾아왔다. 비글로는 요르단과 이라크 국경지대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허트 로커'를 찍었다. 외신에 따르면 1시간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사막의 촬영장에 그는 그 어느 스태프보다 먼저 도착해 촬영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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