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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5> 이구(李久) 부인 전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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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5> 이구(李久) 부인 전주이씨

입력
2010.03.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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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의 부인 전주이씨는 선조의 호성공신(扈聖功臣) 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의 딸이요, 성종의 아들 이성군(利城君)의 손녀딸이다. 왕실에서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유족했다. 9살 때의 일이다. 당시 그녀의 아명(兒名)은 효숙(孝淑)이었다. 이경검은 외동딸 효숙을 각별히 사랑했다. 그리하여 난리통에 무너진 집을 수리할 때도 등에 업고 공사를 감독했다.

이경검은 무심코 실언을 했다. 이 집을 효숙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장난 삼아 한 말이다. 그러나 효숙은 그 이후 이 집은 자기 집이라고 주장했다. 이경검은 선비로서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고사에도 나온다. 나이 어린 성왕은 아우와 놀다가 오동잎으로 동생을 제후에 봉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삼촌 주공(周公)이 하례했다. 성종이 재미 삼아 한 말이라 하자 "천자는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하면서 아우를 당나라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경검은 서울 남쪽 명례방(明禮坊)에 있는 기와집 한 채를 사서 효숙에게 주었다. 그 분재기(分財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오빠 이안국(李安國 )은 증인으로서 날인했다.

그 후 효숙은 영의정 이산해의 손주며느리, 재상 이경전(李慶全)의 며느리가 되었다. 시집을 잘 간 것이다. 그러나 남편 이구(李久)가 4살 난 아들 이상빈(李尙賓)을 남겨둔 채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전주이씨는 혼자 집안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우선 이산해의 전장(田庄)이 있는 예산(禮山) 한가리(閒暇里)로 이사 갔다. 거기서 보령(保寧)과 신창(新昌)·단양(丹陽)·온양(溫陽)·아산(峨山)의 토지를 경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비 300구를 소유할 정도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

전주이씨는 서울 집을 그대로 두었다. 자손들의 교육과 사환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노력으로 아들 이상빈이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32살에 죽고, 그의 아들 이운근(李雲根)이 생원시에 합격해 의령현감까지 지냈다. 이운근의 처남은 이관징(李觀徵)이요, 처조카는 이옥(李沃 )이다. 이들은 숙종조 남인의 핵심세력이었다. 이 때에 와서 이산해 집안은 남인으로 자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덕운(李德運)은 문과에 급제해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이덕운의 손자 이수일(李秀逸)은 문과에 급제해 승지를 지냈고, 이수일의 5대손인 이남규(李南珪)는 문과를 급제해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다. 전주이씨는 기울어져 가는 이산해 가문을 일으킨 여장부였다. 지금도 예산에는 수당고택이라는 이름으로 전주이씨가 지은 낡은 고택이 한 채 남아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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