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은 다음 행보를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산꾼들도 가끔은 잊는다. 한용외(63) 전 삼성전자 사장은 달랐다. 2000년 삼성전자의 사장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성취감에 젖는 대신 내려가야 할 때를 생각했다.
지난해 공식 은퇴하면서 그는 사회복지법인 인클로버(In Clover) 설립을 추진, 지난해 12월30일 사단법인설립허가증을 손에 쥐었다.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세운 인클로버는 그가 오랫동안 꿈꾸고 준비해왔던 다문화가정 청소년 복지사업을 위한 큰 그림이다.
인클로버는 한 이사장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행복한 세상 속으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뭔 지 아세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행운을 기대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정작 중요한 행복은 짓밟고 있다는 것을 모르죠. 클로버의 잎은 하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트가 세 개 모여 클로버가 되지요. 사랑을 모아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다문화가정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2007년 삼성사회봉사단장으로 일하던 시절, 경남지역 행사에 내려갔다가 산등성이마다 내걸린 플래카드를 보고 충격을 받아 갖게 됐다. 지자체 단체장 이름으로 내걸린 플래카드의'농촌 총각 결혼시켜드립니다'는 내용을 보고 그는 '아, 정말 큰 일 났다'싶었다.
"국제결혼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으로 떠오른 시대이지만 그 후유증은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어요. 도시보다 순혈주의가 훨씬 강한 시골에서 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난 혼혈아이들이 학교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은 뻔하고 결국 왕따 문제, 한글을 모르는 엄마와의 갈등,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 가정 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정체성 고민 등이 아이들을 사회의 어두운 구석으로 내몰겠지요. 초중등과정이야 의무교육이지만 고등학교 이후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때부터 한 이사장은 사회봉사단 활동 영역의 하나로 다문화가정 지원 분야를 넣었다. 막연히 사회복지운동가로 설정한 인생이모작의 방향추가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을 건강한 한국인으로 키우는 복지활동으로 확고해진 것도 이 때였다.
인클로버는 올해 설립 첫 해라는 점을 감안 비교적 수월한 사업부터 시작한다. 우선 다문화가정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책 보내기 운동을 실시한다. 또 다문화가정의 건강한 자립을 격려하기 위한 생활수기 공모전도 펼친다. 내년부터는 각종 기업과 지자체, 정부 기관 등과 손잡고 본격적인 사업에 나선다.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한 이사장의 사진 스승인 조세현씨와 손잡고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사진작가 육성 교실도 연다. 이 밖에 변호사 의사 등 각종 전문직종에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특수분야에서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방향을 정하니 할 일이 너무 많고 아이디어가 샘 솟는다"고 했다.
한 이사장의 좌우명은 '손해 보면서 살자'이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대목.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한 그 자신의 3대 원칙을 듣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좀 손해를 봐도 조직이 잘 되고 친구가 잘 되면 궁극적으로는 나도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을 보세요, 좋은 인연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은 돈 시간 능력 등 어떤 면에서나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번째 원칙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기다. 자연히 남이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남을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웃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진다.
10억원이라는 큰 돈을 선뜻 내놓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 것을 내놓는 자세에서 나왔으려니 싶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대통령이 복권 당첨금을 사회환원하자 못내 아쉬워하던 영부인의 모습이 떠올라 혹시 부인 반응은 어땠느냐 물었더니 "불만이 많죠, 자기 맘대로 한다고"라며 함박웃음이 터진다. 그래도 가족이 항상 큰 힘이다. 부인도 이사회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자 디자인연구소에 다니는 아들은 인클로버의 CI작업을 도맡아 해주었다.
한 이사장은 "은퇴하면 부부동반 해서 해외여행 실컷 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반대"라고 했다. 노는 것도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는 것도 그냥 놀면 싫증나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49곳을 모두 가본다는 목적을 세우고 부지런히 가본 뒤 책을 써서 남기는 등 목적이 있어야 오래 가지요. 이래도 저래도 한 번 가면 안 오는 인생, 의미 있게 살고 싶습니다."
● 한용외의 인생이모작 5원칙
한용외 이사장은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예지력을 들었다. 이모작이 단순한 소일거리로 그치지 않으려면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멀리 보고 중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그는 1988년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방문해 느닷없이 '디지털 시대를 준비하라'고 화두를 던진 것을 들며 "디지털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대에 이 전 회장은 이미 오늘날의 정보통신사회를 내다본 셈"이라고 회고했다. 한 이사장이 말하는 인생이모작을 준비하는 5원칙을 소개한다.
1. 너 자신을 알고 그 자체로 사랑하라: 자신을 만능, 혹은 무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런 일도 못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정확히 판단하라
2.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토대로 중장기 계획을 세워라: 퇴임 이후의 일을 퇴임 때 생각하는 건 어리석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미리 준비하라.
3. 목표 달성을 위해 전문지식을 습득하라: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본인도 사회복지 활동가라는 목표를 세운 뒤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에 이어 박사 과정을 수료, 현재 논문을 준비 중이다.
4.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되면 바로 실천하라: 재다가 시간 다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천하지 않는 계획은 없느니만 못하다.
5. 자신을 응원해줄 지원군을 만들어라: 혼자서 이루는 일은 없다. 자신의 일에 반대할만한 사람들은 사전에 설득, 이해 시켜라. 특히 가족의 지원은 필수다.
● 사진작가 한용외
한용외 이사장은 벌써 세차례 단체전을 가진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일은 복지활동으로, 즐거움은 문화예술을 통해'를 목표로 인생이모작을 준비하던 2006년 무렵 처음 사진에 입문했다. 삼성그룹 사장단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급 골프실력을 자랑하지만 보다 개인적인 취미를 갖고 싶었다. 국내 내로라하는 경영인들 1,0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포토&컬쳐 클럽에 참가하면서 출사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바쁜 시간을 쪼개 시골장터를 좇아 다니며 사진을 찍고 해외 출장길에도 묵직한 카메라 장비를 챙겨가는 일이 일상이 됐다. 삼성사회봉사단장 시절엔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하나인 불우노인 영정 찍어주기 행사에서 직접 영정촬영에 나서기도 했다. 한 이사장은 "카메라는 내게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선물했다"고 말한다.
"소중한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모험과 기다림, 애정을 바쳐야 하는지 새삼 알게 됐어요. 2008년 독도에 갔을 때는 헬리콥터를 타고 안전벨트를 온몸에 감고 상체를 헬기 밖에 내놓은 상태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뭔가를 새로 배우는 일에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매달 한 번씩은 컬쳐&포토 클럽회원들과 함께 출사에 나선다. 지난 달 홍콩 출장길에 가져간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겼더니 수리담당자가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셔터박스가 깨졌다"고 혀를 내둘렀다. 내달엔 클럽 회원들과 함께 헤이리로 출사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