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서정오(55)씨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래동화를 비딱하게 들춰 <교과서 옛이야기 살펴보기> (열린어린이 발행)를 냈다.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는 옛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져 가며 깊숙이 읽은 일종의 독후감이다. 그리 읽으니 본뜻이 뒤틀리고 풍자의 방향이 꺾이고 데데한 관념이 덧붙은 것이 태반이다. 서씨는 "제구실을 못하는 옛이야기는 또 하나의 골치 아픈 '공부거리'에 머물고 말 것"이라며 "공부를 즐겁게 해주는 해독제인 옛이야기의 바람직한 거듭남"을 촉구한다. 교과서>
3학년 1학기 읽기 교과서 '지혜로운 아들'을 보자. 한겨울에 산딸기를 구해 오라는 사또의 말에 쩔쩔매는 이방과 그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은 사또에게 "아버지가 산딸기 따러 가셨다가 독사에 물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한겨울에 무슨 독사냐"고 꾸짖는 사또에게 아들 왈, "겨울에는 독사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산딸기도 없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는 '(사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로 끝난다.
서씨는 <한국구비문학대계> 에 채록된 이 이야기의 바탕 설화와 교과서를 비교, 교과서에서 탈색돼버린 '민중성'이라는 고갱이를 짚는다. "야 이눔의 자슥아, 오동지 설한풍에 독새가 어딨노?" "아이구, 사또님. 요새 산에 딸이 어디 있습디까?"… "아들이 똑똑해. 그래 그놈을 쥑이 놓으면 더 큰일나겄해. 그래 못 쥑인다." 교과서에서는 그저 성미 고약한 괴짜로 그려진 사또지만, 구전 설화에서 사또는 아랫사람 위에 군림하는 압제자의 모습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서씨는 "옛이야기는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만든 것이며 민중의 보편 정서가 스며 있기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강자는 부당하게 약자를 누르고, 약자는 생존을 위해 거기에 맞서며, 대결의 끝은 약자의 승리로 마감되는 것이 우리 옛이야기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 그러나 교과서 속에서 이런 구도는 물크러지고 '양식 있는 주인공 사또'의 회심으로 끝을 맺는다. 서씨는 "어린이들은 대개 약자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야기를 즐기는데, 강자의 논리는 이 동일시를 깨뜨리고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쉽다"고 지적한다.
'힘센 농부'(3학년 2학기 읽기) 또한 통쾌한 뒤집기의 해학이 말라버린 사례로 등장한다. 산적에 둘러싸인 선비 앞에 힘센 농부가 나타나 도적을 쫓는데 선비는 우쭐해진 이 농부를 다시금 훈계한다는, 겸양의 교훈을 가르치는 이야기다. 그런데 본래 구전 설화에서는 힘 자랑을 하는 것이 선비이고, 그를 깨우치는 이는 곰배팔이 절름발이다. 서씨는 "강자가 약자를 풍자하는" 교과서 속의 뒤바뀐 처지를 놓고 "어린이들은 통쾌함을 느끼기보다는 무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될 것 같다"고 꼬집는다.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여필종부의 난폭한 유교 이념"을 덮어 씌운 '견우와 직녀', "빗나간 풍자로 어색한 교훈"을 주입하고 있는 '멸치의 꿈' 등도 우리 교과서 속에서 왜곡된 옛이야기의 사례로 지적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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