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 지음ㆍ곽차섭 옮김/푸른역사 발행ㆍ612쪽ㆍ3만3,000원
지금부터 약 500년 전인 1518년, 이집트 카이로를 떠나 모로코의 파스로 가던 배가 당시 지중해를 누비던 에스파냐 해적에 나포된다. 이 배에 타고 있던 32세의 무슬림 외교관 알와잔은 기독교도인 해적선 선장에 의해 로마의 교황 레오10세에게 바쳐진다. 파스의 술탄을 위해 일하던 이 박식하고 영민한 청년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이탈리아에서 9년 간 살다가 1527년 로마 약탈 직후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튀니스에 정착한다.
<책략가의 여행> 은 유럽에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삶을 추론을 바탕으로, 미시사적으로 접근해서 쓴 책이다. 추론을 택한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지은이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시사의 대가. 희미한 흔적밖에 없는 알와잔의 삶을 그리기 위해 그는 알와잔이 쓴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당대의 사료, 역사적 사건들과 비교 검토해서 이 책을 썼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패권을 다투던 당시 정세와 그 안에서 서로 대결하면서 교류했던 에스파냐, 오스만 투르크,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북아프리카의 상황을 알와잔의 삶과 촘촘하게 엮어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마르탱> 책략가의>
알와잔은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추기경과 학자 등에게 아랍어를 가르쳤고, 바울 서간의 아랍어 번역본을 필사했으며, 아랍어-히브리어-라틴어 사전 편찬, 쿠란의 아랍어 필사본과 라틴어 번역본을 교정하는 데 참여했다. 또 아프리카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대작 '아프리카 우주지리지'를 썼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돼 아프리카와 이슬람 신앙에 관한 유럽인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는 알와잔을 두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 책략가로 본다. 로마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도로 개종해야 했을 것이고, 무슬림으로 되돌아와서는 그런 전력을 감춰야 했을 터. 지은이는 '아프리카 우주지리지'에 나오는, 땅과 바다 양쪽에서 살 수 있는 양서조(兩棲鳥) 이야기는 알와잔 자신의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처음 다른 새들과 함께 살던 이 새는 새들의 왕이 세금을 내라고 하자 바다로 도망쳐 물고기들과 산다. 그러다가 물고기의 왕도 세금을 거두려 하자 다시 새들에게 돌아간다. 결국 세금을 안 내고 산 것이다.
이 책은 알와잔이 양서조처럼 살면서 이슬람과 기독교, 두 세계의 다리를 놓았다고 강조한다. '아프리카 우주지리지'에서 알와잔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평하게 두 세계를 다루면서 서로 다른 문화 간 교차와 혼종, 소통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런 태도는, 동시대 양 진영의 문헌이 대부분 상호 비방과 편견으로 일관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문명충돌론이 유행하는 이 시대, 알와잔의 삶을 추적한 이 책은 그래서 더 주목할 만하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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