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책략가의 여행' 이슬람과 기독교를 오간 사나이…그 삶의 흔적을 좇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책략가의 여행' 이슬람과 기독교를 오간 사나이…그 삶의 흔적을 좇다

입력
2010.03.02 08:40
0 0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 지음ㆍ곽차섭 옮김/푸른역사 발행ㆍ612쪽ㆍ3만3,000원

지금부터 약 500년 전인 1518년, 이집트 카이로를 떠나 모로코의 파스로 가던 배가 당시 지중해를 누비던 에스파냐 해적에 나포된다. 이 배에 타고 있던 32세의 무슬림 외교관 알와잔은 기독교도인 해적선 선장에 의해 로마의 교황 레오10세에게 바쳐진다. 파스의 술탄을 위해 일하던 이 박식하고 영민한 청년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이탈리아에서 9년 간 살다가 1527년 로마 약탈 직후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튀니스에 정착한다.

<책략가의 여행> 은 유럽에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삶을 추론을 바탕으로, 미시사적으로 접근해서 쓴 책이다. 추론을 택한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지은이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시사의 대가. 희미한 흔적밖에 없는 알와잔의 삶을 그리기 위해 그는 알와잔이 쓴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당대의 사료, 역사적 사건들과 비교 검토해서 이 책을 썼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패권을 다투던 당시 정세와 그 안에서 서로 대결하면서 교류했던 에스파냐, 오스만 투르크,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북아프리카의 상황을 알와잔의 삶과 촘촘하게 엮어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알와잔은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추기경과 학자 등에게 아랍어를 가르쳤고, 바울 서간의 아랍어 번역본을 필사했으며, 아랍어-히브리어-라틴어 사전 편찬, 쿠란의 아랍어 필사본과 라틴어 번역본을 교정하는 데 참여했다. 또 아프리카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대작 '아프리카 우주지리지'를 썼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돼 아프리카와 이슬람 신앙에 관한 유럽인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는 알와잔을 두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 책략가로 본다. 로마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도로 개종해야 했을 것이고, 무슬림으로 되돌아와서는 그런 전력을 감춰야 했을 터. 지은이는 '아프리카 우주지리지'에 나오는, 땅과 바다 양쪽에서 살 수 있는 양서조(兩棲鳥) 이야기는 알와잔 자신의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처음 다른 새들과 함께 살던 이 새는 새들의 왕이 세금을 내라고 하자 바다로 도망쳐 물고기들과 산다. 그러다가 물고기의 왕도 세금을 거두려 하자 다시 새들에게 돌아간다. 결국 세금을 안 내고 산 것이다.

이 책은 알와잔이 양서조처럼 살면서 이슬람과 기독교, 두 세계의 다리를 놓았다고 강조한다. '아프리카 우주지리지'에서 알와잔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평하게 두 세계를 다루면서 서로 다른 문화 간 교차와 혼종, 소통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런 태도는, 동시대 양 진영의 문헌이 대부분 상호 비방과 편견으로 일관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문명충돌론이 유행하는 이 시대, 알와잔의 삶을 추적한 이 책은 그래서 더 주목할 만하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