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효율성과 사회안정만을 강조하는 관료주도형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개혁 지향의 중산층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한 ‘중민론(中民論)’ 등 진보적 사회이론을 펼쳐온 한상진(65)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비판적 사회이론가로서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 때는 제2건국범국민추진위 기획위원,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내는 등 정책가로도 활동했던 그가 지난달 정년퇴임 후 서울대입구역 인근에 ‘한상진 사회이론연구소’를 설립했다. 강단 밖 사회이론가로서의 새출발인 셈이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지난달 28일 만난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이론의 눈으로 현실을 깊게 응시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중심이론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연구소 운용 계획을 밝히며 시작한 대화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소통 부재에 대한 진단, 집권 3년차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망 등으로 이어졌다.
-‘한상진 사회이론연구소’라는 이름을 지었다.
“대학에 시장 논리가 침투하면서 취업과 무관한 ‘사회이론’을 강의하기 어려워졌다. 국민의 가치 지향이나 사고방식을 사회이론으로 설명해야 미래 사회의 밑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정책을 만들 수도 있다. 연구소에 내 이름을 건 것은 유야무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세대 간 의식 연구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과연 위기에 처했는가.
“선거민주주의를 성취했다는 점에 자신감을 갖게 됐지만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의 진입부에 있을 뿐이다. 선거민주주의 정착 이후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것이 문제다. 진보는 복지중심적인 민주주의를, 보수는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국민이 현 단계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체감하느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2007년과 2010년을 비교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인 시민적 자유권이 식별 가능할 정도로 위축됐다.”
-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가.
“이명박 정부는 우리가 오랫동안 극복하려 했던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려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해야 일사불란해진다’는 데 익숙하고, 거기 대한 향수가 있다. 이 정부는 그것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의 경험 속에 성장한 세대들은 상당한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독립성을 강조하는 법원에서 요즘 전향적인 판결들이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기를 바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그런 경제적 소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현 정부는 이전 정부에 비해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 또 그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서민 행보를 취하는데, 서민들은 ‘경제가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는 것 같다. 촛불시위로 위기감을 느낀 보수진영이 전례 없이 결집한 반면 진보세력은 구심점이 없는 것도 원인이다. 지지율은 미래에 대한 기대심리에 기반한 것이다. 결실이 없으면 곧 가라앉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사회개혁을 선호하는 중산층을 ‘중민(中民)’으로 개념화했는데, 이들의 보수화도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198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개혁 성향의 중산층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이 집단은 다른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사회정의에 관심이 높고 민중의 이익을 고려하는 집단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때 최고조로 결집됐는데 이후 현실정치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 괴리를 느끼며 환멸을 느끼게 됐고 지금은 자신을 대변하는 정치적 구심점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집단이 보수화됐느냐고 묻는다면 동의할 수 없다. 적지않은 이들이 의료봉사나 교육봉사를 하고 있고 연대의 끈을 가지고 있다.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다.”
- 중산층이 된 386세대는 이제 가치보다는 욕망을 지향하지 않는가.
“물론 나는 역사를 이상주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옳은 명제’다. 그러나 역사적인 변혁기에는 단기적인 이익을 억제하는 사례도 많다.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낸 1930년대 스웨덴 대기업 노동자들이 좋은 예다. 우리의 경우 1980년대 운동권에 매우 급진적인 분파도 있었지만 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대통령직선제 쟁취라는 목표를 위해 자제했다. 공동의 철학과 목표가 결합된 프로그램이 나오면 이들은 협력할 것이다.”
- 한국 英맛?최대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빈부격차 극복과 양극화 해소다. 사회적인 대타협이 필요한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목전의 이익을 확장시키거나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최대주의적 경쟁, 적자생존의 경쟁’ 체질로는 어렵다. 기득권층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경쟁의 부담을 약자에게 전가하려 한다면 결국 힘과 힘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이상주의적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를 감싸안으려는 포용적인 리더십이 존재한다. 빈곤층,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 안으로 포용하려는 윤리나 리더십을 몸으로 실천했던 386세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 집권 3년차의 이명박 정부에 조언을 한다면.
“이전 정부들이 정권 중반기 어려움에 빠진 것은 ‘과신’ 때문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적 성취를 이뤄내고 싶어하기에 탓할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욕망에 집착하면 안 된다. 복합적인 한국사회를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이끌어가면 난파될 수 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을 것 같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한상진硏 1000명 조사 "現정부 들어 시민 자유권 위축 느껴"
한상진사회이론연구소는 지난 1월 전국 성인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체감지수’에 대해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2007년과 비교해 언론(표현)의 자유는 60.4점(100점 만점)에서 50.2점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는 58.4점에서 46.5점으로, 임의연행의 두려움 여부는 50.2점에서 43.2점으로 하락했다. 50점 이상이면 긍정적, 이하는 부정적이라는 의미다.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비해 시민적 자유권의 위축을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주의 필수항목 12개를 평가한 ‘민본지수’ 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항목은 평등한 교육기회의 보장(85.7점)이었다. 이어 절차민주주의의 완성(85.6점),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존중(84.1점) 순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실현은 어느 정도인가의 차이를나타내는 ‘발전격차’에 대한 설문에서는 ‘시민적 자유권’에 해당하는 항목의 격차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 존중, 억압에 대한 국민의 저항 자유, 정부 비판의 자유, 소수자 권리 보호 항목이 각각 34.8점, 33.9점, 32.5점, 33.1점이었다. 실직자의 국가로부터의 실업수당 수령, 부유층의 세금으로 빈곤층에 대한 생계보조금 지급 등은 격차가 15.6점, 23.1점에 불과했다.
한상진 소장은 “인권존중, 국민저항권 등의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높으나 발전격차가 커 국민의 가치지향에 비해 시민적 자유권의 실현이 지나치게 억제돼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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