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후 동계올림픽에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나오지 않는다고 치자. 그래서 우리가 잘 모르는 한ㆍ일 양국의 꿈나무 선수들이 금메달을 겨룬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객관적 확률로만 따진다면, 일본의 승산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제2의 김연아'가 보고 싶고 예비스타 곽민정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은 일. 선수층(인력)으로 보나, 아이스링크 같은 연습시설(인프라)로 보나, 투입할 수 있는 자금력(자본)으로 보나, 냉정히 따져 한국보다는 일본이 여전히 한 수 위기 때문이다.
사실 김연아의 금메달은 그래서 더 감동스러웠다. 일본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거둔 결실이어서 더 소중했다. 만약 피겨의 위상이 양궁이나 태권도 정도였다면, 이렇게까지 진한 여운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김연아는 확실히 타고난 천재였다. 작은 얼굴과 긴 팔ㆍ다리를 가진 신체조건, '끼' 넘치는 표현력, 독한 근성에 승부사 기질까지, 그에겐 '피겨 퀸의 DNA'가 흐르고 있다고들 한다. 전문가들도 "연아처럼 완벽한 천재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천재 김연아, 그 다음은 뭘까. 그의 퇴장과 함께 한국피겨의 영광도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길은 시스템에서 찾아야 한다. '제2의 김연아'가 태어나기 어렵다면, '제2의 김연아'를 만들어 낼 시스템이라도 갖춰야 한다. 자본을 투입해 피겨 인프라를 구축하고, 훈련체계를 개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선수층이 두터워지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밴쿠버 굴욕에도 불구하고, 소치에서 일본의 전망이 한국보다 밝아 보이는 이유 역시 앞선 시스템에 있다.
10여년전 골프의 박세리는 지금 김연아에 비유될 만 했다. 국내 여자골프 환경은 열악했지만, 그는 세계 정상에 섰다. 박세리에겐 시스템 부재를 이겨낼 천재적 DNA가 있었던 것이다.
박세리의 신화 이후 국내 골프 인프라는 확대됐다. 많은 여자대회가 창설되고, 스폰서들이 줄을 잇는 등 '시장'도 형성됐다. 우수 선수가 몰리고 실력이 향상된 것은 당연한 일. 박세리와 달리 신지애 최나연 등 '세리 키즈'들은 시스템이 키워낸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김연아의 금메달을 더욱 값지게 하려면, 감동을 넘어 시스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보다 나은 인프라, 보다 개선된 훈련방식, 보다 커진 시장을 통해 수많은 '연아 키즈'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밴쿠버의 기적은 영원히 재연될 수 없는 한번의 신화로 끝나고 말 것이다.
물론 시스템보다는 천재성이 더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기약 없는 영웅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어차피 승리해야 할 경쟁이라면, 이 감동이 끝나기 전 시스템부터 구축하고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시스템의 절실함이 스포츠만은 아닐 것이다. 카리스마적 보스에 의존하는 한국정치를 정상화하는 것, 극소수 선도적 대기업과 품목에 의존하는 한국경제의 기반을 넓히는 것, 심지어 노벨상 타는 것까지도 오직 '시스템'만이 해결해줄 것이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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